이제 여자 선수들 가운데는 남자 친구의 존재를 당당히 밝히는 선수가 많아졌다.
여자 골프 선수들에게 결혼과 은퇴는 더 이상 공식이 아니다. 결혼 뒤에도 가정과 골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하는 여자 골퍼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서희경(27·하이트진로)이 품절녀가 됐다. 서희경은 11월 30일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새신부가 됐다.
서희경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통산 11승을 거둔 뒤 지난 201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남다른 패션감각으로 ‘필드의 패션모델’로 불리며 남성 팬들의 마음을 훔쳤다.
서희경의 마음을 훔친 행운의 주인공은 7살 연상의 은행원 국정훈씨(34)다. 서희경와 국씨는 지난 2011년 10월 국내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하나·외환 챔피언십 때 지인의 소개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올 초 약혼사실을 당당히 공개한 뒤 투어대회에 자주 동반하는 모습이 목격됐고, 2년여 만에 결혼에 홀인(Hole in)했다.
11월 25일 박인비가 미국 네이플스 티뷰론 골프장에서 CME그룹 타이틀홀더스 대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버지 박건규씨, 약혼자 남기협씨, 박인비, 박인비의 유학시절 영어를 가르친 백인 부부, 어머니 김성자씨. | 연합뉴스
연애사에 관대해진 시선들
과거 여자 프로들은 이성교제에 대해 숨기려는 성향이 강했다. 보수적인 스포츠인 골프의 특성 때문에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란 생각을 했다. 여자 선수들의 부모들 가운데는 이성교제를 하면 딴 데 신경이 팔려 볼이 잘 맞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 이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이제 여자 선수들 가운데는 남자친구의 존재를 당당히 밝히는 선수가 많아졌다. 반면 이성교제가 경기력과 이미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많지 않아졌다. 딸의 이성교제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는 부모들도 보기 힘들어졌다.
선수들의 연애관을 바꿔놓은 주인공은 박인비(25·KB금융그룹)다. 박인비는 2011년 프로골퍼 출신 남기협씨(32)와의 약혼사실을 공개했다. 여자 선수들의 경우 약혼자를 공개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거라는 매니지먼트사의 만류가 있었지만 오히려 당당했다.
박인비는 고등학교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골프아카데미에서 남씨를 만나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가 2006년 먼저 고백해 사랑을 쟁취했다.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이후 슬럼프에 빠졌지만 남씨와 약혼한 뒤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2011년부터 박인비를 따라 LPGA 투어에 다니고 있는 남씨는 약혼자로서의 역할은 물론 스윙 코치, 멘탈 코치는 물론 매니저 역할까지 해낸다.
스윙 난조로 드라이버 입스(Yips·불안증)까지 겪었던 박인비는 남씨의 도움으로 스윙을 교정하며 지난해 2승에 이어 올해 6승을 거뒀다. 여자 골프 세계랭킹 1위가 됐고 올 시즌 한국인 최초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면서 ‘골프계의 전설’이 됐다.
10월 10일 서희경이 경기도 여주의 블루헤런 골프장에서 열린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1라운드 17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 KLPGA 제공
박인비는 “오빠와 함께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경기에 더 집중하게 됐고 코스에 서는 것이 더 즐거워졌다. 성적도 좋아졌고 내 골프인생도 더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달라진 결혼관
L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여자 선수들에게 박인비의 연애는 롤모델이 되어 가고 있다. 선수들은 대회가 시작되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는 남자친구가 있는 박인비에 대해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여자 골프 세계랭킹 3위 스테이시 루이스(28·미국)는 “박인비는 지난해부터 멘탈이 더 좋아졌고 더 강한 선수가 됐다. 약혼자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모든 선수가 두 사람을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서희경은 “2011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외롭고 힘들었다. 든든한 지원군이 있는 (박)인비가 부러웠다”며 “나도 약혼을 한 뒤 약혼자가 투어생활을 하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 투어에서 뛰는 선수들도 대부분 박인비처럼 되고 싶어한다. 서희경의 결혼식에 참석한 김하늘(25·KT)은 “희경 언니나 인비를 보면서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졌다. 27세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싶다. 나를 이해해주는 남자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혼관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여자 선수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선수로서의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분위기 때문에 결혼을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한창 물오른 20~30대를 골프에만 올인하면서 혼기를 놓친 선수들이 넘쳐났다.
한 가정의 며느리, 남편, 엄마라는 숙제 앞에서 결혼 후 얼마 안 가 은퇴수순을 밟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뒤에도 투어에 남은 선수는 LPGA 투어의 한희원(35·KB금융그룹), 장정(33·볼빅), KLPGA 투어의 최혜정(29·볼빅) 정도다.
그러나 최근에는 결혼 후에도 선수생활을 이어가기를 희망하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사업가, 연예인과 결혼하는 선수도 더러 있었지만 신혼의 단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제는 자신을 이해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가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힌다.
서희경은 “프로 골퍼는 투어의 특성상 매주 집을 떠나 있어야 한다. 주말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직업의 특성을 이해해주는 배우자를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12월 7일 성형외과 의사인 이주홍씨(33)와 백년가약을 맺은 배경은(28)도 선수생활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동하다 KLPGA 투어로 복귀한 배경은은 올 시즌 내내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결혼과 동시에 은퇴한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배경은은 투어 시드를 유지하는 한 투어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배경은은 “그만두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하면 남편은 오히려 더 하라고 한다”며 “골프를 좋아하고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선수생활은 전적으로 내 결정에 달려 있다”고 했다.
한국의 줄리 잉스터 꿈꾸는 서희경
결혼식 뒤 마포에 마련한 신혼집을 정리하기 위해 일주일을 보낸 서희경은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달콤한 신혼여행 뒤에는 다시 1월부터 골프화 끈을 단단히 조여매기로 했다.
서희경은 “결혼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시댁 어른, 남편 등 내편이 늘어났다는 것”이라며 “결혼으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게 된 만큼 내년 시즌부터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2011년 LPGA 투어 신인왕을 차지했지만 올 시즌 톱10 세 번에 그쳤던 그는 한국 투어 활동 시절 지도받았던 고덕호 프로를 찾아가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희경은 “남편은 긍정적 에너지를 가졌다.
내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면서 나를 변화시키려 한다. 남편을 통해 많이 변했고 지금도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희경의 롤모델은 아이 둘을 낳고도 왕성한 투어활동을 하고 있는 줄리 잉스터(53·미국)다. 1983년 LPGA 투어에 데뷔한 잉스터는 두 아들(헤일리, 코리)을 둔 엄마로 통산 31승을 거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서희경은 “나도 10년이 흐른 뒤에도 투어에 남는 게 목표”라며 “아이들을 멋지게 키우고 가정과 투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선수로 인정받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지연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