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비현실·초현실이 뒤섞인, 대한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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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비현실·초현실이 뒤섞인, 대한문 앞

입력 2013.10.01 18:41

600년 역사를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 수문장 교대식, ‘쌍용차 농성’을 막기 위해 조성된 화단과 그 화단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경찰들, 긴장된 공간 안에서 이어지는 ‘촛불’과 ‘맞불’. 21세기 초엽 한반도 사람들의 갈등과 욕망이 그 곳에 중첩되어 있다.

<em>“현실을 잠시 벗어나 비현실적인 곳에서 오랜만에 묵혀둔 원고도 쓰고 책도 읽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는데, 이곳은 차라리 초현실적인 곳이더라.”
</em>
연구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머물다가 2학기 개강에 맞춰 돌아온 성공회대 신방과의 김창남 교수가 내게 한 말이다. 그가 연구년(안식년이라고도 한다)을 맞아 한국이라는 현실을 잠시 떠난 것은 지난 대통령 선거 전의 일이다. 투표를 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베를린으로 떠났으니 김 교수는 2013년 상반기의 갈등과 혼돈으로부터 어느 정도 물러서 있었던 셈이다. 이윽고 ‘꿈결’ 같은 연구년이 끝나고, 2학기 개강에 맞춰 8월 말에 귀국을 했는데, 그리하여 현실에서 벗어나 비현실로 잠시 나갔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는데, 돌아온 바로 다음날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터졌다.

덕수궁 앞 수문장 교대식.

덕수궁 앞 수문장 교대식.

뇌관을 안고 있는 아슬아슬한 공간
‘국정원 선거개입’,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파문’ 그리고 그밖의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속되었고, 급기야 ‘채동욱 파문’에 ‘기초노령연금 파문’까지 이어졌다. 이런 양상을 보면서 김창남 교수는 “한반도는 차라리 초현실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정황을 덕수궁 앞에서 확인한다. 오후 3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서 있다 보면 지금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과 욕망을 목격할 수 있다.

이 한반도는, 지금 당장 내전을 치르고 몇몇 다급한 나라들을 제외하고 보면, 사회적 갈등의 종류와 양상들, 특히 그것의 표출 방식이 가히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가장 강렬하고도 극적인 그런 나라임에 틀림없다. 현대 대도시의 중심지는 당대 사람들의 모든 갈등과 욕망이 혼집되는 공간이다. 얼핏 보기에 차분한 도시의 오후처럼 보이지만, 마치 살얼음판 위의 아슬아슬한 걸음걸이처럼, 도심의 주요 공간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도 있는 갈등의 뇌관을 끌어안고 있다.

자, 덕수궁 앞으로 가보자. 수문장 교대식이 벌어진다. 예전에는 공익근무요원들이 이를 보직으로 맡아 진행했지만 지금은 전문 이벤트 업체에서 담당한다. 그들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뒤편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소문청사 앞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내려온 그들은 앞 시간대에 왕궁 수비대 역할을 한 동료들과 교대식을 한다. 북소리와 태평소 소리가 나면 일부러 이 시간을 맞춰 기다린 사람들은 물론 때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걸음을 멈춘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이 덕수궁(경운궁)을 정궁으로 썼던 임금은 고종인데, 그 무렵이면 이미 신식군대(별기군)가 대한문을 지켰겠지만 지금 이벤트로 펼치는 옷차림은 조선 중기 때 양식이다.

국가의 공간 장악 단적으로 보여줘
그러나 저러나, 과거에 왕궁을 지키는 군졸들이 있었겠지만, 이 같은 복식과 양식과 군악을 울리는 것은 모두 지난 90년대 후반에 ‘관광상품’ 차원에서 ‘만들어진 전통’이다. 지금은 새누리당 의원이 된, 당시 서울시 공무원 이노근씨가 주도했던 작업인데, 역사적 고증의 문제나 그것의 재현 방식에 대한 이의가 거듭 제기되었으나 ‘문화관광’ 차원에서 지속되고 있다.

(위) 덕수궁 앞 쌍용차 집회 모습. (아래) 화단을 보호하기 위해 지키고 있는 경찰들.

(위) 덕수궁 앞 쌍용차 집회 모습. (아래) 화단을 보호하기 위해 지키고 있는 경찰들.

차차 경복궁·창덕궁으로 번지더니 이제는 안동·진주·나주·공주·순천 같은 곳에서도 하나의 ‘구경거리’로 재현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수문장 교대식이 전범으로 삼고 있는 영국 버킹엄 궁전의 교대식도 그들의 ‘오랜 역사적 전통’이 아니라 188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식 때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국가주의 문화통치를 설명한 바 있다.

600년 역사의 유구한 문화유산 한복판에서 역사적 근거와 고증과 재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경거리’로서의 수문장 교대식이 아무런 성찰과 의식 없이 전개되는 가운데 세종로 쪽으로 향하는 돌담길에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는 인도였다. 인도 위에 화단을 급조한 것은 대한문 일대에서 오랫동안 진행되고 있는 ‘쌍용차 농성’을 막기 위한 국가의 선택이다. 중구청·남대문경찰서 등이 화단을 조성하였고, 그 ‘화단’을 보호하기 위해 펜스를 쳤고, 그 펜스와 나란히 하여 경찰들이 경계를 선다.

한쪽에서는 역사적 근거가 불확실하고 고증 여부도 불투명한 ‘만들어진 전통’이 600년 역사를 한낱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리는 행사가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가 ‘화단’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력을 배치한, 그야말로 기묘하고도 낯선 ‘초현실’적인 양상이다.

경찰 버스는 인도에 빠짝 붙어 있다. 이 일대에서 집회나 시위라도 열리게 되면 버스 행렬은 더 많아지고 그 간격은 더 좁아진다. 가히 주차의 달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사람 하나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촘촘하게 주차한다. 사람들은, 비록 집회 참가자가 아닐지라도,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면 기나긴 버스 행렬을 길게 돌아가야 한다. 그 경찰 버스 앞에는 쌍용차 농성, 국정원 선거개입 등과 관련한 집회나 1인 시위가 수시로 열리고 이를 반대하는 단체들도 이른바 ‘맞불시위’를 벌인다.

국가는 근거가 희박한 ‘만들어진 전통’으로 이 공간을 관제화(혹은 박제화)된 역사의 공간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화단을 지키는 경찰과 줄지어 선 경찰 버스는 도심의 공공 공간을 국가가 어떤 관점에서 장악하고 관리하는지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 긴장된 공간 안에서 농성과 집회가 이어진다. ‘촛불’도 있고 ‘맞불’도 있다. 그 사이를 시민들은 바쁘게 지나간다. 대한문 앞은 오래 전부터 ‘문화정치’의 공간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먼 훗날, 역사학자와 문명사가와 인류학자들이 21세기 초엽의 한반도 사람들이 어떤 갈등과 욕망의 중첩과 대립 속에서 살아갔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면, 2013년 가을의 덕수궁 대한문 앞에 관한 기록과 자료를 반드시 살펴야 할 것이다. 당장의 현실이자, 벗어나고 싶은 비현실이자,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초현실적인 공간, 그곳이 바로 덕수궁 대한문 앞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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