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에서 제목은 그 작품의 성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영화나 대중음악의 경우 제목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의 경우 나이가 들어서는 제목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청소년기에는 ‘있어 보이는’ 제목에 이끌려 작품을 읽어보기도 했다.
유진 글래드스턴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의 <밤으로의 긴 여로>도 그런 작품의 하나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라는 시적인 제목은 청소년 시절 특유의 감성을 자극해 나를 사로잡았다. 삶이란 밤으로의 긴 여로가 아니겠는가 하는 그런 감성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고서야 그 진가를 다시 발견하게 됐다. 노벨문학상이 작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미국 작가들 가운데 왜 오닐이 싱클레어 루이스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1936)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 <밤으로의 긴 여로>다.
이 작품은 희곡이다. 그 내용은 여름 별장으로 놀러온 한 가족의 하룻밤 이야기다. 늙은 무대배우 아버지 티론, 마약중독자 어머니 메리, 알코올 중독자 형 제이미, 그리고 결핵을 앓는 시인 동생 에드먼드가 주인공들이다. 여느 가족이 그렇듯 이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사랑과 미움이 공존한다. 서로를 공격해 상심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이해를 구하고 용서하게 된다는 내용이 줄거리를 이룬다.
변하는 사회·경제적 구조변동 속에서 믿음과 안식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은 이제 거친 사막을 건너가는 유목민과도 같다. 사진은 휴일을 맞아 공원에 나들이 나온 가족. | 경향자료 사진
<밤으로의 긴 여로>는 오닐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에 나오는 에드먼드는 오닐 자신이다. 오닐은 이 작품을 1939년에 집필했지만 그가 죽은 뒤 25년 동안 발표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너무나 정직하고 고통스럽게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1953년 죽은 다음 1956년에 부인은 이 작품을 공개했다. 책 앞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실려 있다.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치오. (…) 내게 사랑에 대한 신념을 주어 마침내 죽은 가족들을 마주하고 이 극을 쓸 수 있도록 해준, 고뇌에 시달리는 티론 가족 네 사람 모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로 이 글을 쓰게 해준, 당신의 사랑과 다정함에 감사하는 뜻으로 이 글을 바치오.”
여기서 당신이란 세 번째 부인 칼로타 오닐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쓴 날은 두 사람의 열두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오닐은 바로 아내와의 사랑을 통해 과거의 가족과 화해를 시도한다. 이 작품의 대사 하나 하나에는 가족간의 사랑과 연민, 그리고 미움이 담겨 있고, 희곡이든 연극이든 그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새삼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20세기 전반인 1912년 미국 중산층 가족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준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돌아보게 되는 것은 (오닐이 가족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지만) 지난 20세기 미국 중산층 가족의 역사다. 유럽을 떠난 이주민들이 세운 국가로서 미국은 열심히 일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중산층의 신화를 간직해 온 나라다. 양초제조업자 아들인 벤저민 프랭클린에서 아칸소주 촌뜨기인 빌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의 전형으로 여겨져 왔다.
통계들은 이를 구체적으로 증거한다. 미국 400대 부자 중에서 부를 물려받은 이가 1980년대 중반에는 200여명이었지만, 2004년에는 37명뿐이었다. 2005년 현재 미국인 4분의 3은 계급상승 기회가 30년 전과 같거나 그보다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연줄과 배경보다도 성실과 교육이 성공의 주요 요소라는 믿음은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을 이룬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 민음사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산층을 포함해 미국의 계급구조를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본 저작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원제는 ‘문제는 계급이다’(Class Matters))는 다른 사실을 전한다. 뉴욕타임스의 2005년 기획탐사보도를 책으로 묶어낸 이 저작은 미국의 계급이동이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활발하지 않다고 전한다. 통계에 따르면, 전체 소득을 다섯 단계로 나눴을 때 1980년대에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올라가는 가족은 1970년대보다 줄었고, 1990년대에는 더 줄었다.
여러 통계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오늘날 미국은 불평등이 점점 고착화됨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한편에선 미국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평등하다는 담론이 널리 유포돼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계급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져가고 있다. 계급구조의 허리를 이루는 중산층의 위기는 계급이동의 사다리를 굳건하게 만들어온 미국에서도 목도할 수 있는 현상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가족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보편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시대적 구속을 뛰어넘는 큰 울림을 안겨준다. 정서적으로 가장 친밀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 이들이 가족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이 넘치는 ‘행복한 가족’이 아니라 연민과 미움이 뒤엉킨 ‘위기의 가족’인 오닐의 가족은 다름 아닌 우리의 가족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서적·정신적 수준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가족의 위기가 오늘날 사회적·경제적 수준에서도 관찰된다는 점이다. 제목인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밤’이라는 말을 통해 오닐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가족 간의 관계이지만, 거기에 더하여 내가 보기에 밤으로 가는 긴 여행길은 오늘날 가족 그 자체의 초상이기도 하다. 변하는 사회·경제적 구조변동 속에서 믿음과 안식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은 이제 거친 사막을 건너가는 유목민과도 같다. 그리고 이러한 풍경은 미국 중산층은 물론 우리 사회 중산층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꿈 같은 존재. 우리의 짧은 인생은 잠으로 완성되나니.”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아버지 티론이 읊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오닐 자신이기도 한 아들 에드먼드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우리는 거름 같은 존재. 그러니 실컷 마시고 잊어버리자.” 모처럼 <밤으로의 긴 여로>을 다시 읽어보면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가족은 여전히 우리의 편안한 잠과 행복한 꿈을 지켜줄 수 있는 거친 바람 부는 이 세상의 마지막 거처인가?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