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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각본, 빛나는 연기

입력 2013.08.2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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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숨바꼭질

감독·각본 허정

출연배우 손현주_성수, 문정희_주희, 전미선_민지

개봉 2013년 8월 14일

등급 15세 관람가

영리한 각본을 가지고도 이야기에 대한 과한 자신감 탓에 영화를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 장르 영화의 경우 이와 같은 풍경이 자주 되풀이된다. 시나리오 상의 극적 반전 따위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심지어 그 영화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들마저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 영화적 만듦새는 쉽게 산으로 간다. 그런 영화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적 언어가 아닌 ‘대사’로 상황을 정리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영화는 영화이지 글이 아니다. 글로 풀 거라면 종이에 써서 팔면 된다. 간단한 사실인데 의외로 흔하게 간과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숨바꼭질>은 이미 좋은 각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나은 영화가 생산된 사례라 할 만하다. <숨바꼭질>은 현 시점 대중의 욕망과 관심사 혹은 결핍을 잘 파고든 영리한 각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연출자와 배우들이 결과물의 최종 꼴에 관한 같은 비전을 공유하면서 최선의 만듦새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뚜렷한 영화다. 잘 만든 장르 영화를 일년에 한두 편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한국영화계에서 <숨바꼭질>은 여러 모로 기분 좋은 에너지를 선사한다.

성수는 일산의 고급 아파트에서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중산층이다. 그에게 흠이 있다면 과한 결벽증이 있다는 것 정도다. 그의 결벽증은 어린 시절 형과 관련된 사건 탓에 만들어진 것이다. 성수의 형은 그 사건 이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범죄에 빠져들면서 지금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상태다.

어느날 성수는 이상한 전화를 받는다. 성수의 형이 철거 직전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꽤 오랜 시간 실종되어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짐을 좀 빼달라는 내용이다. 주변 이웃들은 형에 대한 언급을 꺼린다. 이 아파트에는 이상한 풍문이 있다. 누군가 남의 집에 들어가 몰래 살면서 나중에는 집주인을 없애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성수는 이 풍문의 주인공이 자신의 형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이 저주 같은 일은 성수의 일산 아파트에까지 옮겨가기에 이른다.

완벽한 영화가 아니다. 빈 구석이 많은 영화다. 결말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중간 중간 설명되지 않은 디테일이 많다. 편집 단계에서 잘려나간 장면들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럴 거면 추가 촬영을 하든, 관련 시퀀스를 빼버리든 대안이 필요했다. 107분 정도의 러닝타임에서 10분 정도를 들어내면 지금보다 훨씬 보기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바꼭질>은 근사한 영화다. <숨바꼭질>은 일산이라는 의미심장한 공간의 고급 아파트를 무대로 한 부동산 스릴러다. 여기서 주인공은 성수를 중심으로 한 그의 가족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가족에 대해 어떤 종류의 온기도 드러내지 않는다. 성수의 처는 한국의 중산층이 가질 법한 욕망의 결정체와 같은 인물이다. 성수는 가부장으로서, 부동산 소유주로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들은 사건이 끝나고 나면 부동산을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그만이다. 관객이 심정적으로 공감하게 되는 건 되레 악인 쪽이다. 이 악인이 “다 내꺼야!”라고 소리지를 때 전율이 느껴지는 건, 같은 공간을 살아나가고 있는 구성원으로서 그렇게 병적으로 비뚤어진 결핍이 부동산 정글과도 같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생존법이었음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건 문정희다. 그녀는 <숨바꼭질>과 유사한 장르의 기존 한국영화에서, 그녀와 유사한 롤을 연기했던 여배우들이 흔히 보여준 관습적 태도나 표정, 발성을 완전히 떨쳐내고 영화의 함량에 결정적인 자기 몫을 해낸다. 배우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전면 철회하고 재고할 만큼 그녀의 존재감이 탁월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대해 이 정도의 집중력과 이해도를 보여주는 기성 배우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경험이다.

허지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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