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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년, ‘지루한 장마’가 어서 끝나기를

입력 2013.07.23 15:56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이해 경향신문에서 이화여대 박인휘 교수와 ‘김호기·박인휘의 DMZ 평화 기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인천 강화도 양사면에 있는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였다. 취재를 맡은 홍진수 기자, 사진을 맡은 김기남 기자와 동행했는데,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포를 거쳐 강화를 오갔던 그날은 하루 종일 장대비가 쏟아지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지루한 장마의 시간이었다.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윤흥길 소설 <장마>의 첫 부분이다. 강화도로 가는 도중 쏟아붓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떠올린 구절이다. 여름이 되면 겪게 되는 장마는 동아시아 몬순(계절풍) 기후가 갖는 특징의 하나다. 매년 6월부터 7월까지 겪게 되는 장마가 외국에 살았을 때는 더러 그립기도 했지만 더 없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연속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여름의 하나는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일 것이다.

강화도 제적봉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배를 통해 오갈 수 있는 이곳과 저곳은 아주 가까운 생활권이었다. | 김기남 기자

강화도 제적봉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배를 통해 오갈 수 있는 이곳과 저곳은 아주 가까운 생활권이었다. | 김기남 기자

<장마>는 바로 이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이다. 10살 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한국전쟁에서 나타난 대립과 갈등을 그린 중편소설이다. 소설의 기본 구조는 빨치산이 돼 산속에 숨어 지내는 아들을 둔 친할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국군이 됐지만 안타깝게 전사한 외할머니 사이의 갈등이다. 두 할머니의 관계는 남과 북의 대립을 상징하는데, 윤흥길은 이 대립 속에 나타난 전쟁이라는 비극은 물론 인간적인 미움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낸다. 비가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는 장마는 다름 아닌 한국전쟁의 은유다.

돌아보면 한국전쟁은 해방, 산업화, 민주화와 함께 우리 현대사의 큰 전환을 이뤘던 일대 사건이다. 북한의 남한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 왔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유엔군과 중국군을 포함한 군인 322만명, 민간인 249만명에 달했다.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비극이었다.

전쟁의 포성이 그친 것은 1953년 7월 27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1951년 7월 17일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끝났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적대행위와 일체의 무장행동 중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설정, 군사정전위 및 중립국 감독위 설치, 전쟁포로 인도 및 인수,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의 소집’ 등이었다. 정전협정에 따라 1954년 제네바에서 정치회의가 87일 동안 열렸지만 성과 없이 종결됐다. 이런 불안정한 협정 때문에 지난 60여년간 남과 북 사이에는 여러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중요한 것은 1953년 체결된 게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전쟁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정전협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전 60년은 냉전 40년과 탈냉전 20년으로 이어져 왔는데, 탈냉전 20년은 다시 2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주고받은 후 1993년 북핵 위기가 있었지만 세계사적 탈냉전의 흐름에 병행해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된 시기다. 이어 두 번째는 2006년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한 후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을 거치면서 군사적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전면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도 했던 시기다. 세계사적인 탈이념의 흐름 속에 남과 북의 군사적 긴장이 강화되는 ‘탈냉전 속의 냉전’이라는 현실이 현재 한반도가 놓여 있는 자리다.

윤흥길 소설 , 민음사 | 민음사

윤흥길 소설 <장마>, 민음사 | 민음사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 문제는 이런 평화로 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다는 점이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과제는 북핵문제의 해결이다. 우리 정부와 미국은 ‘선 핵문제 해결, 후 평화체제 구축’을 강조하는 반면, 북한은 ‘선 평화체제 구축, 후 핵문제 해결’을 고수하고 있다. 당연히 핵문제를 해결하고 난 다음 평화체제 구축을 모색해야 하지만, 북한이 핵을 자위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답답한 국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탈냉전 20년이 주는 교훈은 정전상태라는 절반의 평화를 넘어서 완전한 평화로 가기 위한 지름길은 없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남과 북이 다각적인 대화를 통한 협력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핵심 이해당사자들인 미국·중국과 함께 다자간 평화협력 관계를 꾸준히 모색하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길이다. 이 평화로 가는 도정에서 정전 60주년을 맞이한 올해가 새로운 전환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당혀야 할 일을 사분이 대신 맡었구랴. 그 험한 일을 다 치르노라고 얼매나 수고시렀으꼬.”
“인자는 다 지나간 일이닝게 그런 말씀 고만두시고 어서어서 묌이나 잘 추시리기라우.”

<장마>의 마지막에 나오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대화다. 현실의 갈등이 너무 치열했던 탓인지 윤흥길은 이렇게 구렁이를 등장시켜 화해를 모색한다. 산으로 들어간 아들을 대신해 나타난 구렁이를 보고 친할머니가 기절을 하자, 외할머니가 정성을 다해 구렁이를 달래 사라지게 한다.

어떤 이들은 작가가 샤머니즘을 끌어와 비현실적 화해를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실의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으며, 바로 그 비현실적인 화해의 방식이 전후 세대가 바라보는 전쟁의 비합리성과 비극성을 생생히 전달한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불안정한 평화의 현실을 돌아볼 때 소설 <장마>가 주는 울림은 지금도 작지 않다.

제적봉평화전망대에 서서 좁은 바다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니 마음이 더 없이 착잡했다.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배를 통해 오갈 수 있는 이곳과 저곳은 아주 가까운 생활권이었으리라. 사람들이 오갈 수 없는, 시간이 정지된 바다를 바라보며 박 교수와 나는 말을 잇기 어려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장대비가 다시 쏟아졌다. 이 답답하고 지루한 장마가 어서 끝나기를 소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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