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 이 한밤에 남편은 /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 외투 쓴 검은 순사가 / 왔다- 갔다- /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김동환의 장시 <국경의 밤>은 이렇게 시작한다. 192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당시 국경을 이룬 두만강 풍경을 생생히 전달한다. 식민지 시대에 두만강에서 소금 밀수출로 살아가는 한 부부의 애잔한 삶과 사랑을 다룬 이 시는 우리나라 현대시에서 이야기를 도입한 최초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해본 게 국경이란 말이다. 그때 나로서는 국경이란 말이 주는 느낌을 온전히 실감하기 어려웠다. 휴전선에 의해 가로막혀 있기에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야지만 다른 나라의 영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경은 나라들 사이의 영토적 경계다. 이 경계에 놓인 ‘국경도시’는 자기 나라 사회와 문화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사회와 문화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국경도시는 그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압록강 변 신의주시 쪽 강변에 서 북한 노동자들이 하역 작업을 하고 있다. | 김석구 기자
국경은 나라들 사이의 영토적 경계다. 이 경계에 놓인 ‘국경도시’는 자기 나라 사회와 문화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사회와 문화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국경도시는 그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내가 국경이란 말을 실감한 것은 멕시코와의 경계에 있는 미국 샌디에이고나 독일, 프랑스와의 국경에 있는 스위스 바젤을 방문했을 때였다.
특히 바젤은 국경이란 말이 주는 느낌의 실체가 뭔지를 확연히 깨닫게 했다. 독일과 프랑스 영토와 바로 접해 있는 바젤은 국경도시가 갖는 상이한 문화들의 공존을 실감하게 했다. 바젤은 근대 유럽을 주도해 온 지식인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칼 융, 그리고 누구보다도 르네상스의 지적 거인인 에라스무스가 바젤대학에서 가르쳤다. 네덜란드 출신인 에라스무스는 여러 나라의 국경 위에서 활동한, 국경을 넘어선 근대 벽두의 세계주의자였다.
바젤과 더불어 스위스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도시가 로잔이다. 스위스의 다른 주요 도시들이 그러하듯 로잔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가 있는 유서 깊은 국제도시다. 로잔이 내게 나름 각별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한 가수의 노래에 있다. 루시드 폴이 부른 ‘국경의 밤’이다. 개인적으로 루시드 폴을 전혀 모른다. 그가 로잔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가수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내가 아는 전부다. 3집 앨범 <국경의 밤>에 실린 이 곡은 그가 유학 중에 발표한 것이다.
“너의 어깨에 나의 손을 올리니 / 쑥스럽게도 시간은 마냥 뒤로 흘러가 / 시간 없는 곳에서 정지한 널 붙잡고 / 큰소리 내지 않으며 얘기하고 있구나.”
이렇게 시작하는 ‘국경의 밤’에 담긴 내용은 한 친구에 대한 회상으로 채워져 있다. 국경의 밤 풍경이라기보다 국경의 밤에 떠오를 듯한 상념들을 노래한다. 음악은 그것을 작곡한 이들의 위치를 고려하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울림,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베르디의 오페라들을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연관시키거나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을 스탈린 체제와 연관시켜 듣게 되면, 그 작품이 주는 울림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多聲性)을 갖게 한다. 루시드 폴의 ‘국경의 밤’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돌진하는 내 현실. / 전투하듯 우리 사는 동안에도 / 조금도 바꾸지 못한 네 얼굴. / 의젓하게 멀리 나를 보러 온 / 청년이 된, 그러나 내겐 / 소년인 내 친구, 그대여.”
친구가 멀리 있는 나를 보러 온 곳이 로잔인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노랫말은 제목인 ‘국경의 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국경이란 낯선 공간은 떠난 온 공간과 그 공간 속에서의 삶과 우정을 회상하게 하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그런 상념의 시간은 새삼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읊조리듯 노래하는 이 곡은 국경에서 맞이하는 밤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 속에서 자각되는 우정의 소중함을 다소 쓸쓸하면서도 정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국경의 밤’을 부른 가수 루시드 폴. | 경향자료사진
‘국경의 밤’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낯선 국경의 이미지와 이런 국경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의식이다. 루시드 폴은 쓸쓸함 속의 우정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회학 연구자인 내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국경의식’ 또는 ‘경계의식’이다. 국경 또는 경계의식은 서로 다른 생각과 문화가 공존하고 교차하는 일종의 혼성(hybrid) 의식이다.
이런 혼성의식에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혼성의식은 세계화의 진전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서서히 확산돼 왔다. 특히 다문화 사회의 도래를 고려할 때 여러 의식과 문화들이 접합되고 중첩되고 혼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와 같은 부모 세대가 국경을 실감하기 어려웠다면, 이제 자녀 세대는 국경의 밤을 체험하고 노래하고 있다.
둘째, 이런 혼성의식은 문화의 세계화가 가져온 또 하나의 현상인 민족주의의 강화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영국의 사회이론가 스튜어트 홀이 강조하듯이 세계화로 인해 민족 정체성은 약화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강화하기도 하며, 또 새로운 혼성의 정체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의식과 정체성의 공존은 한편으로 상이한 문화들 사이의 긴장을 강화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몇 년 만인지 둘이서 / 함께 도로를 달리던 밤. / 별처럼 반짝인 / 고단한 네 외로움, 네 사랑들 (…) 소년인 내 친구, 청년이 된 / 내겐 소년인 내 친구, 그대여.”
지금 ‘국경의 밤’을 다시 들어보고 있다. 그리고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루시드 폴의 ‘국경의 밤’에 담긴 정서를 비교하고, 그 두 밤들 사이에 놓인 거리를 생각해보고 있다. 시를 통해서든, 노래를 통해서든 정서 표현의 풍요로움은 좋은 사회로 가기 위한 매우 중요한 문화적 조건이다. 루시드 폴이 연구자로서의 삶을 그만둔 게 다소 아쉽지만, 가수로서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래들을 앞으로도 더 많이 불러주기를 기대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