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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서, 느린 여행을 찾아서

입력 2013.07.08 16:44

여름이 절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연 여행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충전을 모색하는 여행은 근대 이후 상당한 변화를 겪어 왔다. 여행 대상지의 경우 이름난 고적이나 아름다운 자연, 유명 휴가지를 찾아가던 게 이제까지의 주요 경향이었다면, 낯선 지역을 찾아가 그곳의 지방성(locality)을 새롭게 발견하고 체험하는 게 최근의 한 흐름이다.

여행의 방식에도 변화가 관찰된다. 대개의 경우 자동차나 비행기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여행을 하는 게 주요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걷기로 대표되는 ‘느린 여행’이 나름의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느린 여행을 하기 위해선 목적지까지 빠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여행의 본령은 속도를 강제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느리고 더딘 흐름 속에서 충전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려는 데 있다.

전국적으로 장맛비가 내린 7월 2일 오전 출근시간, 서울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이 장대비를 맞으며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전국적으로 장맛비가 내린 7월 2일 오전 출근시간, 서울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이 장대비를 맞으며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안나푸르나 트레킹, 산티아고 순례길,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은 느린 여행의 대표적인 명소들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길을 따라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다. 걷고 또 걷는 시간 속에서 삶과 자연과 신앙을 재발견하고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신경림의 시 ‘장자(莊子)를 빌려: 원통에서’의 첫 부분이다. 그의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이 시집은 강원도 철원에서 전라남도 영암에 이르기까지 전국 여러 지방들과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시집 제목이 암시하듯 길로 상징되는 여행 속에서 신경림은 삶과 사회를 돌아보고 있다.

나의 경우 가장 좋아하는 길은 경주 감은사지에서 대왕암까지 가는 길, 그리고 이어서 해안도로를 따라 한갓진 포구인 감포까지 가는 길이다. 통일신라 시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세운 감은사지는 거대한 동탑과 서탑으로 유명하다. 토함산 연봉이 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한 감은사지로부터 저 멀리 바라보이는 문무왕의 대왕암을 향해 걸어가는 길은 오래된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을 처음 찾은 때는 30년 전 대학교 4학년 늦가을이었다. 버스를 타고 감은사지 앞에서 내려 웅장하면서도 기품 있는 동탑과 서탑을 둘러보고 동해바다에 떠 있는 대왕암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 푸른 바다에 홀로, 그러나 의연히 떠 있는 대왕암을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다.

대왕암을 구경한 다음 감포까지 이어진 길은 때로는 버스를 타고 때로는 걷기도 했는데, 그곳에선 바다를 벗해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쩌다 그곳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게 되면 높아가는 파도소리와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느리고 더딘 시간을 보낸 다음 감포에서 버스를 타고 경주로 돌아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곤 했다.

‘다음날에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장자를 빌려’의 중간 부분이다. 대청봉이란 외부에서 삶과 사회를 바라봤다면, 이제 원통이란 내부에서 삶과 사회를 재발견하는 내용이다. 삶이, 세상살이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내부에서 지켜보면 그것들은 더 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일들로 이뤄져 있고, 때로는 역설적이고 또 모순적이기도 하다. 신경림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삶의 내부와 외부를 이렇게 차분히 응시한다.

신경림 시인의 시 ‘장자(莊子)를 빌려 : 원통에서’가 실린 기행시집  /창비사

신경림 시인의 시 ‘장자(莊子)를 빌려 : 원통에서’가 실린 기행시집 <길> /창비사

길을 따라 걷는 여행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느림에 담긴 사회학적 의미다. 굳이 이름 붙이면 그것은 근대적 속도의 강박에 대한 거부와 성찰이다. 우리 사회에서 속도의 강박을 잘 드러내는 말들이 ‘초전박살’, ‘일망타진’, ‘전광석화’다. 이 말들은 한편에서 속도를 강조함으로써 빠른 시간 안에 상당한 성과를 가져오게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절차를 무시하고 과도한 경쟁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삶을 황폐화시켜 오기도 했다.

느린 여행은 빠른 삶이 아닌 더딘 삶을 옹호한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옆에서 바라보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느린 여행을 좋아한다고 해서 경쟁과 속도가 갖는 효율성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행을 가서까지 속도의 강박에 쫓길 필요가 없으며, 나아가 삶의 가치를 속도·경쟁·효율 등으로만 채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느린 여행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것은 근대의 빠른 속도를 숭앙하는 삶에서, 더딘 속도로 살아가는 삶에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장자를 빌려’로 돌아가면, 신경림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짓고 있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구절은 시 말미에도 적혀 있듯이 <장자(莊子)>의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대지관어원근(大知觀於遠近)’을 차용한 것이다. 진정한 앎이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봐야 한다는 의미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 놓인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가까이 놓인 삶을 지켜볼 수도 있다. 연일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이 장마가 끝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훌쩍 떠나 대왕암으로 가는 길 위에 다시 한 번 서고 싶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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