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스파이소설에 대해 썼는데, 이야기하는 김에 추리소설을 하나 더 다루고 싶다. 이 작품은 그 형식이 추리소설이다. 하지만 내용은 역사소설, 철학소설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채로운 사유의 백화점을 보여준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이다. 기호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에코가 1980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1980년대 서구문화를 뒤흔들어 놓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면서 <장미의 이름>은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토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발표했을 때 기호학자가 여기(餘技)로 소설을 한 번 써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코는 이어 <푸코의 진자>, <바우돌리노> 등 일련의 문제작을 연속 발표해 요즘은 기호학자라기보다 소설가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는 듯하다. <장미의 이름>이 에코의 대표작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상상력과 통찰력의 측면에서 <푸코의 진자>나 <바우돌리노>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 소설은 소설가로서의 그의 새로운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그 역시 속으로는 ‘난 원래 이런 이야기꾼이기도 했어’라고 자부했을 것 같은 작품이다.
지난해 6월, 보수단체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연 ‘종북세력 퇴출 및 종북정당 해산 촉구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소설은 1327년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엄과 멜크 수도원의 수련사 아드소가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한 베네딕트 수도원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묵시록에 예언된 것처럼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월리엄과 아드소가 이 사건들의 정체인 장서관의 비밀을 풀어내는 게 그 기본 줄거리다. 작품은 에코가 존경해온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이야기와 영국 추리소설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차용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기법을 활용한다.
<장미의 이름>을 읽는 데는 여러 시각이 제시돼 왔다. 역사학적, 철학적, 기호학적,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적 시각에서 이 소설이 갖는 복합적 의미망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이뤄져 왔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회학적 시각이다. 사회학적 시각은 다름 아닌 에코가 이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포스트모던 세계관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절정은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識者)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라는 내용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 장서관에 존재해온 사실이 밝혀지는 데 있다. 존재하지도 않은 <시학> 2권을 에코가 내세운 것은 비극을 높이 평가한 <시학>에 대한 저항 내지 해체를 함축하며, 사회학적으로 보면 사유의 복수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옹호하기 위한 고도의 지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렇게 긍정적인 사유로 보고 있지는 않다. 마르크스에서 베버를 거쳐 하버마스와 기든스로 이어지는 계몽주의 사회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강조하듯이 이성과 합리성의 구현이라는 계몽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며, 특히 우리 사회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실을 지켜보면 올바른 계몽의 실현이야말로 일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코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강조하는 다원주의의 상상력을 부정할 수만도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의 이념적 현실에 있다.
이념과 이념논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념은 현실세계를 독해하는 틀이자 눈이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양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념논쟁에 담겨진 정치적 의도의 과잉이다. 상대방의 이념을 아예 부정해버리고 지지세력의 결집을 위해 벌이는 논쟁이라면, 그것은 ‘정파적 이익’을 ‘국가적 이익’에 앞세우려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내 모든 이슈들을 이념의 문제로 환원하고 자기 생각과 다른 이들의 사유를 무조건 ‘종북·빨갱이·좌파’로 보거나 ‘수구·꼴통·우파’로 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이념논쟁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의 이슈가 제기되면 그것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근거 없는 비판들이 이어지고, 정치적 효과가 달성되면 이내 자취를 감추는 일종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지난해 두 개의 선거를 거치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해 왔다는 점이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진리는 본디 하나만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신념만이 옳다는 오만한 생각에 기반해 타인의 생각과 이념에 대해 거침없는 폭력을 행사하는 게 우리 사회 이념논쟁의 현주소다.
정치사회학적으로 볼 때 오늘날 세계사적으로는 탈이념의 경향이 강화하고 있다. 복지국가 시대와 신자유주의 시대가 마감하는 현재, 전환의 문턱 너머에 있는 사회는 이념의 통섭(consilience)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가 진보적 정책을 차용하고, 진보가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관찰할 수 있는 흐름이기도 하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념과 탈이념이 공존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념논쟁을 벌이지 말자는 게 아니라, 논쟁을 하되 사실에 바탕을 둔 생산적 이념논쟁을 전개하자는 데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만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배려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片片)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에코가 성경 <고린도전서>를 인용하여 소설의 프롤로그에 쓴 이 말은 그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진리가 기실 통약불가능하고 결국 부재한다는 상대주의의 세계관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에 관한 이슈들이라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처음부터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원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희소한 가치다. ‘괴물과 싸우는 이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경구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