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추리소설에 심취해 있던 적이 있었다. 코넌 도일, 아가사 크리스티, 앨러리 퀸의 고전들에서 전후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에 이르기까지 적잖이 읽었다. 추리소설과 유사한 장르가 스파이소설이다. 스파이소설은 추리소설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는데, 흔히 이안 플레밍의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고전으로 꼽힌다.
지금 여기서 다루고 싶은 작품은 스파이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다. 196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르 카레는 스파이소설 작가이지만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은 몇몇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소설은 한편으로 박진감 넘치는 흥미를 유발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간과 사회, 개인과 체제의 관계에 대한 섬세한 감성적 묘사를 보여준다. 둘째, 이 소설은 1960년대 당대의 국제관계와 냉혹한 첩보전의 현실 또한 실감나게 그려낸다.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은 추구하는 이념이 달랐지만 첩보전의 방법과 윤리에서는 놀라우리만치 유사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미라지 서니랜드의 애넌버그 별장 앞뜰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AP연합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소설에 나오는 베를린 장벽이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과 서방 3개국의 분할점령 지역인 서베를린의 경계에 쌓은 거대한 콘크리트 담장이다. 이 장벽은 냉전시대의 상징이었다. 1989년 독일 통일과 함께 장벽은 결국 철거됐는데, 당시 독일에서 공부하던 나는 이듬해 무너진 장벽을 보러 갔다. 르 카레는 소설의 마지막 무대로 1960년대 초반 막 세워진 이 ‘냉전의 장벽’을 등장시킨다.
소설의 기본 줄거리는 영국 정보부 요인인 앨릭 리머스가 위장 전향하여 벌이는 첩보전이다. 이 작품이 탁월한 것은 상상을 뛰어넘게 치열한 첩보전 안에 주인공 리머스와 그의 연인 리즈 골드의 애틋한 사랑을 또 하나의 플롯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장을 덮으면 과연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념과 사랑이 본래 진부한 주제이지만, 이 뻔한 주제를 냉혹한 첩보전 속에 풀어 넣음으로써 새삼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소설은 1965년 마틴 리트 감독에 의해 영화화하기도 했다.
발표된 지 50년이 된 이 소설을 책장에서 다시 꺼낸 본 이유는 최근의 국제관계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관계를 특징지어온 것은 앞서 말했듯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냉전이었다. 이념과 체제의 지구적 대결이었던 냉전은 우리 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냉전분단체제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냉전은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외부를 규정짓는 기본 조건이었다. 이러한 ‘냉전 시대’는 독일 통일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해 1990년대에 들어와 ‘탈냉전 시대’로 바뀌었다.
주목할 것은 지난 20년 동안 진행된 탈냉전의 흐름이 최근 ‘G2(미국과 중국) 시대’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탈냉전 시대는 잠자던 대륙인 중국이 깨어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국의 도전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다. 세계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서 G2 시대로 재편되고 있는 게 하나라면, 우리에게 드넓은 상품시장을 제공해 기회의 땅이었던 중국이 추격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게 다른 하나다. 미래학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중국의 발전 추세가 계속 유지된다면 중국의 GDP 규모가 미국을 앞서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몇십년 동안 G2 시대가 공고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6월 7일과 8일에 진행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의 정상회담은 시선을 끌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다뤄진 내용은 크게 다각적 경제협력, 북핵 비핵화 공조, 기후변화 공동대응 강화, 사이버 보안문제 등 공동 검토의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의 경우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양국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는 북핵 비핵화 공조에 대한 천명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항이다.
존 르 카레의 추리소설, 김석희 역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열린책들 제공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협력과 기후변화에 대해선 대체로 공감대를 이룬 반면, 사이버 보안문제나 지적재산권 침해 등에 대해선 이견이 여전히 작지 않았다. 회담 결과를 두고 중국은 사회제도·문화전통·발전단계가 상이한 국가들이 상호 존중과 조화 및 협력으로 윈·윈하는 이른바 ‘신형 대국관계’를 미국이 사실상 수용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한편으로 이렇게 두 국가간의 협력이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적 헤게모니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우리의 경우 미·중관계는 남북관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정치적·경제적 대외관계다. 돌아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100여년 전과 매우 유사하다. 지난 100여년 동안 우리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해양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지만, 이제 중국과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세력과의 관계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라는 양 날개를 어떻게 적극 활용할 것인가,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어떻게 균형 잡힌 대외정책을 추구할 것인가는 현재 열리고 있는 G2 시대에 우리에게 부여된 매우 중차대한 대외 과제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1990년 여름에 나는 베를린을 방문했다. 베를린은 파리, 런던과 함께 유럽의 근·현대사를 주도해온 도시다. 헤겔과 마르크스,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표현주의 화가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도시다. 세계 역사에서 베를린처럼 이념에 의해 분단된, 그리고 극적으로 통합된 도시도 없다.
도착한 다음날 자유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와 함께 무너진 베를린 장벽 근처로 갔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만큼 구경하러 온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바로 그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자연 떠올리게 됐다. 소설 속이긴 하지만 여기 있던 장벽 어딘가에서 두 주인공은 사랑의 소중함을 보여줬다.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서니 동베를린 쪽으로 뻗은 대로인 운터 덴 린덴이 눈에 들어왔다. 운터 덴 린덴은 분단되기 전 베를린을 대표하던 거리다.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운터 덴 린덴 쪽으로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