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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 풍경과 마포의 추억

입력 2013.06.11 11:33

나는 서울 출신이 아니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을 제대로 익히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도봉산 자락에 있는 도봉초등학교로 전학했을 때였다. 당시 도봉동은 시골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중랑천으로 달려가 미역을 감거나 공터에서 축구를 하곤 했다. 요즘도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면 1970년대 초반 도시 변두리 어린이들의 활기차면서도 다소 서글픈 오후를 떠올리게 된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시절에는 시내 가까이 다가갔다. 용문중학교가 있는 돈암동과 장충고등학교가 있는 장충동 주변에서 6년을 보냈다. 1970년대 중반 돈암동에는 개량 한옥들이 많았고, 장충동에는 고급 양옥들이 적지 않았다. 유신시대의 군부 권위주의가 절정에 달한 그때 산업화 과정 속에서 나날이 바뀌어가던 서울의 모습은 정치와 경제의 엇박자처럼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풍경으로 내게 남아 있다.

[김호기의 예술과 사회]골목 안 풍경과 마포의 추억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한 7년을 제외하곤 이제까지 서울을 떠나 산 적이 없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에 서교동, 대방동, 그리고 몇 해 전까지는 대흥동에서 살았다.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마포구 대흥동이었다. 40년 넘게 내가 체험한 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돌이켜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김기찬의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눈빛출판사)이다.

지난번 프랭크 헐리의 남극 사진을 이야기할 때 좋아하는 사진작가 중 한 사람으로 김기찬을 말한 적이 있다. 김기찬의 사진집은 사회학 연구자로서 도시에 관심을 갖고 있어 그런지 펼쳐볼 때마다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책상 가까운 책꽂이에 놓아둔 책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갖는 두 개의 인지능력인 ‘느낌’과 ‘생각’은 사뭇 다른 것이다. 느낌이 감성의 영역이라면, 생각은 이성의 영역이다. 감성과 이성은 긴밀히 연관돼 있지만, 동시에 각기 독립적 영역을 이루고 있다. 예술은 주로 이 느낌과 감성의 영역을 다룬다. 물론 생각과 이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 예술작품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이 마음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김기찬의 사진은 나의 감성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가 렌즈에 잡은 골목 안 풍경들은 내가 오랫동안 지켜봤고 살아온, 낯선 공간들이 아니라 낯익은 장소들이다.

도시 사회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거주하는 곳은 ‘장소(place)’와 ‘공간(space)’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장소가 일상적인 삶이 이뤄지는 곳이라면, 공간은 추상화한 생활이 진행되는 곳이다. 과감히 가치판단을 해보면 낯익고 따뜻한 곳이 장소인 반면, 낯설고 메마른 곳이 공간이다. 장소가 아닌 공간에서의 삶이 다름 아닌 현대 도시생활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김기찬의 사진은 바로 그 공간이 아닌 장소를 재발견하게 한다. 중림동을 중심으로 공덕동, 도화동, 행촌동 등 30년을 넘게 그가 찍은 골목 안 풍경들은 장소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다. 이 기억들은 현재 시점에서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풍경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내 기억을 돌아봐도 바로 저 골목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릴 적의 다정한 친구들이 불현듯 나타나고, 내게 말을 걸고 내 손목을 잡을 것만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김기찬의 사진에 담긴, 기억을 부르는 이 향수의 의미다. 이 향수는 지나간 과거의 것을 그리워하는 회고주의가 아니다. 그가 담아 두려 한 것은 골목 안의 풍경 속에 살아온 우리 삶 자체다. 동시에 그의 사진은 어떤 이념적 호소를 겨냥하고 있지도 않다. 그의 사진에 담긴 이들의 표정은, 설령 현실이 주는 압력이 무겁다 하더라도, 언제나 마음을 환하게 하고 짠하게 하고 또 자연스럽다.

“삶이 힘겹고, 딛는 땅이 비좁고 초라해도 골목안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아끼는 훈훈한 인정이 있고, 끈질긴 삶의 집착과 미래를 향한 꿈이 있다. (…) 나의 고향 서울, 아직도 빛 바래지 않은 서울의 골목, 어린 시절 추억 속의 골목,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공간이기 이전에 장소이며, 장소의 인간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에서 이삿짐을 나르는 이삿짐센터 직원들. | 김기남 기자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공간이기 이전에 장소이며, 장소의 인간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사진은 서울 마포구에서 이삿짐을 나르는 이삿짐센터 직원들. | 김기남 기자

<골목안 풍경 전집>에 나오는 김기찬의 말이다. 이 사진집에는 김기찬의 사진에 대한 여러 감상과 평가들이 있다. 내 시선을 끈 것은 마지막에 실린 2003년 작가 자신이 쓴 글인 ‘‘‘골목안 풍경’을 마무리하며”다. 길지 않은 이 글에서 김기찬은 골목 안 풍경을 담게 된 사연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평생보다 골목이 먼저 끝났으니 이제 골목안 풍경도 끝을 내지 않을 수 없다”고 아쉬워한다.

서울의 변화를 지켜볼 때 김기찬이 말하듯이 골목 안 풍경은 이제 지나간 시간이 돼가고 있다. 하지만 김기찬이 사진에서 담고자 한 마음과 추억과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존과 경쟁의 ‘공간’으로부터 생활과 공존의 ‘장소’로의 전환은 도시로서의 서울이 꿈꿔야 하는 여전히 유효한 미완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아파트단지가 즐비한 현재 서울의 모습을 새롭게 재구조화하는 게 물론 쉬운 과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게 힘들다고 해서 압축개발로 얼룩진 도시를 이대로 놓아둘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경관 및 교통에서 시작해 주거 및 양극화에 이르기까지 ‘인간 도시’로서의 서울의 재구조화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해 왔고, 최근 서울시 역시 이를 위한 도시행정을 구체화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공간이기 이전에 장소이며, 장소의 인간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김기찬의 사진에서 내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도화동과 공덕동 풍경이다. 대방동에서 대흥동으로 이사한 것은 2000년 이른 봄이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염리동, 공덕동, 도화동, 용강동 등 마포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구경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마포대교와 서강대교 아래로 강바람을 쐬러 가기도 했다.

마포를 떠난 것은 2008년 봄이었다. 아파트단지 내 목련꽃이 뚝뚝 떨어지던 날, 사다리차가 와 이삿짐을 내리고 잔금을 치르고 막 떠나려고 할 때, 평소 무덤덤한 공간이었던 마포는 마음 짠한 장소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무채색의 공간이 유채색의 장소인 마포로 변하는 순간, 마포는 내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는 듯했다. 낯선 도시도 낯익은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그때 나는 문득 깨닫게 됐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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