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류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제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지곤 한다. 시장 또는 국가를 이야기하는 학생도 있고, 매스미디어 또는 이례적으로 스포츠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가족, 시장, 민주주의다. 시장은 우리 경제생활을, 민주주의는 정치 및 사회생활을 생산하고 조정하는 핵심 제도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가족은 일상생활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포스터 | 경향자료사진
역사적으로 가족의 등장은 시장과 민주주의보다 더 오래됐다.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하던 전통사회든, 급속한 산업화를 이뤄온 현대사회든 가족의 의미는 남달랐다. 사랑이라는 친밀성에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다면, 그것의 가장 선명한 형태가 가족의 사랑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딸 또는 아들이란 말에는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우나 마음을 뒤흔드는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최근 크게 변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가족이 붕괴되거나 해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를 보면 가족의 모습이 고정돼 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세기를 돌아봐도 핵가족의 부상, 친가 중심의 탈피, ‘기러기 가족’의 등장 등 결코 작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다.
이러한 가족의 변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구 구성의 변화다.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가 23.9%, 2인 가구가 24.3%를 차지해 1~2인 가구의 비중이 50%에 육박했다. 흥미로운 것은 1인 가구의 미래다. 통계청 전망에 따르면, 1인 가구는 2025년 31.3%, 2035년에는 34.3%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예술과 사회를 다루는데,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가족의 의미와 변동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가족을 다룬 예술작품이 수없이 많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려는 작품은 일본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北野武)가 만든 <기쿠지로의 여름>(菊次郞の夏·1999)이다.
가족의 변동은 가족의 해체 또는 붕괴라기보다 오히려 그 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 사진은 대안가정인 그룹 홈을 꾸리고 있는 윤설희씨(가운데) 가족. | 김영민 기자
기타노 타케시의 대표작은 <소나티네>, <하나비>와 같은 하드보일드 영화들이다. 이에 비해 <기쿠지로의 여름>은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일종의 코믹 아닌 코믹 영화이다. 영화의 내용은 초등학생 마사오가 여름방학을 맞이해 야쿠자 출신의 이웃 아저씨인 기쿠지로와 함께 엄마를 찾아가는 여행을 다룬다. 줄거리는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중심 줄거리는 마사오가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이면에는 기쿠지로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또 하나의 줄거리가 놓여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어머니를 만났지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한다. 마사오의 엄마는 이미 다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있었고, 기쿠지로는 양로원에 계신 어머니를 멀리서만 지켜볼 뿐 말없이 발길을 돌린다.
이 영화가 내 시선을 끈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여행 과정에서 두 사람이 쌓아가는 사랑이다. 처음에는 낯설어 하지만 어머니가 곁에 없다는 처지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조금씩 가까워진다. 한갓진 일본의 시골 여름 풍광을 배경으로 순진무구한 마사오와 무뚝뚝하나 속 깊은 기쿠지로의 동행은 웃음을 선사하면서도 마음을 짠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가족의 의미다. 마사오와 같은 처지가 물론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부모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 아이들은 예전에도 적지 않았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가족의 변동이 그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이혼 증가에 따른 편부·편모 내지 조손 가족 문제, 핵가족화 강화에 따른 부모의 돌봄 문제,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고령세대의 고독사 문제 등은 현재 가족이 직면한 새롭고도 중요한 이슈들이다.
가족의 변동을 가져온 원인은 다양하다. 가족의 부양 기능 약화, 가부장적 가족문화의 온존 등의 내적 요인과 사회구조 및 가치관의 변화 등의 외적 요인이 결합돼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러한 가족의 변동을 가족의 해체 또는 붕괴라기보다 오히려 그 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특정 가족 형태를 정상으로 설정하고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만으로 구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족 문제는 이제 주요 정책의 대상이다. 가족의 변동에 대한 대응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문제화한다고 해서 이를 과거회귀적 방식으로 풀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개인주의의 증대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더불어, 돌봄노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 및 대처가 요구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따른 육아 등 돌봄 기능의 약화와 고령 인구의 증가에 따른 돌봄노동의 수요 증대에 대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사려 깊으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엄마를 보고나서 훌쩍이는 마사오에게 기쿠지로가 엄마가 전해주라고 했다며 천사의 종을 건네는 장면이다. 힘들 때나 슬플 때 종을 울리면 천사가 엄마를 데려다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마사오는 어둑한 콘크리트 흄관 안에서 혼자 천사의 종을 흔든다. 바로 그때 하늘에 나타난 천사의 종이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와 마사오의 종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논리보단 사랑이, 이성보단 감성이, 언표보단 비언표가 감싸 흐르는 공간이 가족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오래 전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신 형님들을 늘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만나선 무뚝뚝하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을 뿐이다. 아주 드물게 성가신 적도 없지는 않지만, 언제나 마음속에 강물을 흐르게 하는, 그래서 바로 응시하지 못한 체 비켜서 바라보며 침묵의 언어를 전달하는 존재가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가족의 의미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제도로서의 가족은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 서 있다. 가족의 미래를 가족 안에 가둬둘 게 아니라 공론장으로 이끌어내고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더욱 민주적 가족관계로 변해야 하는 동시에 가족 기능을 사회가 새롭게 분담할 수 있는 양성평등의 가족 패러다임을 마련하는 것을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