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제 이해관계가 개입하지 않은 사건을 볼 때 ‘약자’한테 감정이입을 한다. 심지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무한경쟁과 약자의 도태 필요성을 기꺼이 말하는 아저씨들도 드라마나 뉴스를 볼 때는 그렇다. 스포츠팬들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대해선 압도적인 승리를 선호하지만 다른 팀 경기를 볼 때는 거의 본능적으로 약팀을 응원한다. 하긴 약팀이 의외의 승리를 거두는 게 자기팀 순위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해관계가 무관(?)한 상황에서 약자를 옹호하는 심성도 어쩌면 모종의 진화적 기원을 지닐는지도 모른다. 강자만이 살아남은 세상보다는 약자들이 공존하는 세상이 이기적인 측면에서도 편리할 테니 말이다.
11월 15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임정혁 공안부장이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드라마나 뉴스를 볼 때 약자에 감정이입을 하는 건 사회문제에서 진보적 시선을 드러내는 것과는 큰 관련이 없다. 많은 이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약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무기를 뻔뻔할 정도로 활용해서 제 권리를 지키려는 현실영합적인 ‘을’이 아니라 어떠한 자력 구제장치도 없이 가해자에게 짓밟히는 ‘피해자’ 그 자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사태가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으로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판단을 유보하거나 포기하곤 한다.
하긴 구체적인 피해를 당하고 있는 이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우리가 오지랖 넓게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본능처럼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그런 도식에서 정치적 관심도 자라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도식 자체는 아니고, 추후 사회 현실이 머릿속 멜로드라마와 다르다고 밝혀졌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진보담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닌 현실사회의 ‘을’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파조차 빈곤층이 부유층보다 선량하다고 환상하지만, 실은 부유층보다 훨씬 더 욕망에 충실한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바로 진보담론이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보담론의 옹호자들은 현실세계의 ‘을’을 제 머릿속 멜로드라마 주인공에 끼워맞추는 이들이다. 이제 이런 사유의 폐해가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보라.
민주노동당에서 만 7년 동안 당원이었고 사태 당시 여러 방면으로 취재를 할 기회가 있었던 나는 이 사건의 정황이 ‘모든 정파의 부정선거’를 보여준다고 판단했다. 당권파가 특히 문제가 된 건 그들이 특출난 부정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것이 드러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실행된 당적 절차에 의한 결의를 폭력까지 동원해 지연하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진상조사위 보고서를 볼 때, 비당권파 역시 부정을 저질렀다는 점은 명백했다. 검찰 조사 결과도 결국 진상조사위와 취재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이러한 상식적인 결과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그 상황에서 이석기와 김재연을 악마로 몰아가야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검찰 조사 결과 참여계들이 구속 기소되자 그들 중 일부는 “실은 당권파가 피해자였다. 우리가 속았다!”고 외친다. 역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성’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반성을 요구한다. 하나의 ‘피해자 서사’에서 다른 ‘피해자 서사’로 넘어가는 것을 리얼리티라 믿는다. 나는 진보담론이 이 같은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서사의 빈틈을 해체하는 냉소주의의 전략에 속수무책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 서사’는 냉소주의와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 우리 시대의 씁쓸한 풍경이다.
한윤형<미디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