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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대나무숲’을 기다리며

입력 2012.09.18 17:21

내가 일하는 업계에서는 독특한 패배감이 종종 보인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을 만나거나 트위터 타임라인의 편집자를 모아놓은 리스트를 보면 ‘현실에 어떤 식으로는 좌절하는 탁월한 개인들의 모임’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출판업의 영세성에 비해 개별적인 개인들(특히 편집자)이 가진 능력의 괴리가 너무 크다. 그리고 이것은 소위 열정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들, 주로 ‘판’으로 불리는 문화계통 노동현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출판사들에 노조가 들어서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세한 소규모 사업장(직원 수 10명이 넘어가면 중형, 100명이 넘으면 대형이다)이 많고 이직이 잦으며 한 사업장 내에서도 편집, 디자인, 영업 등이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산별노조가 결성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한마디로 이직하면 이런저런 뒷말이 나도는 업계다. IMF사태 이후 생산업 중심의 대단위 사업체가 아니고서는 노조에 회의적인 시선이 상당히 커진 것 같다.

이때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온 20대의 경우 주로 문화·IT산업에 대한 선호가 강했다. 문제는 열정노동이 강화될수록 ‘역량을 강화해 잘난 개인이 되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커리어를 만드는 것’이 그 판에서 살아남는, 혹은 일찍 직장 커리어를 접고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취업준비생은 공무원, 공기업, 사실상 노조가 없는 쪽을 선택하는 실리적인 계산을 할 수밖에 없다.

트위터 화면 캡처

트위터 화면 캡처

요즘 트위터에 ‘대나무 숲’ 계정 생성이 붐이다. ‘출판사 옆 대나무 숲’ 계정이 그 시작이었다. 이 계정이 생겨난 과정은 정말 픽션보다 더 픽션스러운데 익명으로 내부 고발을 하던 용감한 계정이 짧은 시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평소 사표를 염두에 두고 트위터를 하고 있다는 글을 올린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당사자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권고사직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계폭’(계정 폭파)을 계기로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계정 ‘@bamboo97889’가 생겼다. 비번을 공개하고 있는 이 계정은 누구나 로그인해서 글을 게시할 수 있다. 즉, ‘누가 썼느냐’를 애당초 밝혀낼 수 없는 것이다. 계정 생성 3시간 만에 250개의 글이 올라오고 한 계정으로 게시한 글이 서로에 대한 이견을 드러내거나 자동으로 백업하는 사이트, 리트윗용 보조계정 등이 생성되며 개설 이틀 만에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신문고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웹에서 ‘집단’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내부고발자를 만들지 않으면서 설득력 있는 지지집단을 형성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계정의 등장은 업계에서 공식적으로는 쉬쉬하고 있지만 빠르게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흥미로운 건 여기서부터다. 다른 판 ‘대나무 숲’ 계정들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IT 대나무 숲, 신문사 옆 대나무 숲, 촬영장 옆 대나무 숲, 상근활동가 대나무 숲….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란 말을 듣는,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업종을 중심으로 이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익명성에 기대어 산업구조나 노동환경에 대한 불합리를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공론의 장이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뜻일 것이다. 재밌기보다는 서늘한 풍경이다. 하지만 게릴라적이고 파편화되고, 분산화된 이 방식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작은 균열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고 일어나니 ‘우후죽순’ 대나무 숲이 건물마다 들어선 것 같다. 더 많은 대나무 숲을 기다린다. 그리고 진짜 대나무 숲에서 만날 날이 올까를 생각해본다. 급기야 ‘시댁 옆 대나무 숲’도 등장했다.

김류미<‘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 소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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