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연하의 지인과 대화를 하다 “어릴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더 괜찮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란 환상이 있었다”고 했더니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죠?”라고 물었다. 일종의 세대차를 느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땐 트위터가 없어서… 착각을….” 듣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경향신문 자료
확실히 트위터에선 전공별로, 직능별로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보통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떠들고 생각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모든 걸 확인할 수 있는 이곳에선 누군가들에 대한 인상비평도 난무한다. 물론, 이것은 SNS가 유행하고 난 후의 일은 아니다. 인터넷 게시판에 짧은 코멘트를 붙일 수 있는 덧글 기능이 추가된 이래로, 긴 글을 쓰는 이들에 대한 짧은 인상비평은 만인의 당연한 권리가 되었다. SNS는 그것을 굳이 특정 성향·취향의 게시판에 파고들지 않고도 할 수 있도록 해줬을 뿐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시대, 논쟁보다 인상비평이 더 많은 시대다. 가령 실컷 글을 쓰고 나면 무슨 문제를 던지고 논점이 어떤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와 논변의 스타일에 대한 평이나 잔뜩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내가 별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글을 별로 잘 쓰지 못한다는 그 명백한 사실에 대해 무슨 평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이 그 날카로운 감각으로 내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뭔가를 덧붙이거나 반박을 하면 세상이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트위터를 하면서 인상비평을 잔뜩 늘어놓고 산다. 트위터의 140자 제한 아래에서 가장 하기 편한 게 그것이고, 대체로 사람들이 흥미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이 어떤 집단이나 개인에 대해 인상비평을 했다면 남들이 본인에 대해 인상비평을 하는 것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얘기가, 실제로는 실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남이 나를 조소할 경우 반응하여 그에게 엄밀한 근거를 요구하거나 사과를 요구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물론 이는 내가 남을 조소할 때엔 적용하지 않았던 원칙이다.
근거를 요구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왜 사과를 요구하는가? 왜 나는 해도 되는 일이 남에겐 사과해야 할 일이 되는가? 대체로 사람들이 이런 모순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집단에 대한 인상비평은 정당하고 개인에 대한 인상비평은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 거다. 그러나 이 믿음은 내가 보기에 별 근거가 없다. 오히려 집단에 대한 인상비평이 개인에 대한 인상비평보다 허술하고 그릇된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나보다) 유명한 사람’은 인상비평이나 비난 및 매도를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다소 황당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에게 견고한 믿음이다. 여기서 ‘(나보다) 유명한 사람’이란 자의적인 기준을 ‘공인’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바꿔치기하면 뭔가 그럴 듯한 근거인 양 보인다. 좀 더 시장주의적인 변종으로, “나는 소비자이고 너는 생산자니까”라는 것도 있다. 내 글을 돈 주고 산 적도 없는 이들이 “나는 독자니까 내 모든 클레임을 경청해라”고 내게 요구하는 황당한 일이 생긴다.
그러나 이런 것도 시대의 풍경이다. 그말인 즉슨,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나 역시 인상비평만을 남발하는 이들의 인상비평을 별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인상비평을 섞어 쓸 수밖에 없는 글 쓰는 이의 입장으로, 이 넘치는 인상비평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보다 SNS를 어릴 때부터 시작하게 될 후세대들은 자신의 인상비평을 즐기면서 남의 인상비평을 되도록 기분 나쁘지 않게 수용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고민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한윤형<미디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