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 도서의 지침이나 멘토의 범람을 비판하는 것은 소위 진보적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겐 너무나 손쉬운 일이다. 그것들이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사람들에게 자기 힘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달콤한 환각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 비판의 대략적인 취지다.
그런데 내가 관찰한 바 그런 것을 경청하는 이들이 환각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은 정치에 대해 논하는 이들보다 훨씬 인생을 팍팍하게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환각제라기보단 각성제였고, 실제로 그들이 내용도 비슷비슷한 그 얘기를 듣는 이유도 무슨 실제적인 효과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공동체의 정치를 논하는 이들의 삶이 훨씬 한가해 보이고, 차라리 꿈을 꾸는 상태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4·11 총선을 앞둔 지난 4월 8일 충남 공주시 시외버스터미널 앞 공터에서 시민들이 한 후보의 선거유세를 지켜보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스스로도 정치평론을 하는 입장으로 정치평론가들이 과연 멘토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자문해보게 된다. 특히 개별 사안에 대한 이해나 맥락 파악 없이 밑도 끝도 없는 야권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이라면 더 그렇다. 그들의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통합해야 당선이다”일텐데, 이 구호(?)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미쳐야 성공한다”보다 더 구체적인이고 의미있는 조언인가? 정치인들을 향한 그들의 요구는 대부분 국민의 명령, 시대의 요구, 진정성 등의 수사로 ‘얼렁뚱땅’ 이루어진다. 그들과 멘토의 차이는 멘토는 대부분의 생활인들을 예상독자로 삼기에 상업성을 지닐 수 있는 반면, 그들의 예상독자는 정치인·정치자영업자·정치건달로 이루어진 지극히 한정된 계층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다. 그래서 정치평론가들의 조언은 상업성을 획득할 수 없고 예상독자인 정치영역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질타하는 ‘아우라’마저 띠게 되지만, 맥락을 따져볼 때 밑도 끝도 없는 조언이라는 점은 비슷하지 않은가?
정치인은 심지어는 자신이 공천에서 떨어질 경우 자당의 공천 경쟁자가 당선되는 것도 바라지 않을 만큼 이기적인 존재다. 문제는 그게 그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라, 제법 비범한 존재이지만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는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이기심이야 도덕적 잣대로 질타하면 그만이라 하더라도 통합 요구를 통해 가치와 지향이 다른 소수정당·정파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미치는 부분은 어찌할 것인가. 곽노현과 박명기의 후보단일화를 종용한 그들이 단일화로 인한 친구의 재정파탄을 타개하기 위한 ‘선의로 건네진 돈’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면죄받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선거 때만 되면 민주당 이외 군소정당들이 죽을 것을 강요하던 그들이 선거 끝나고 나면 민주당이 국민의 열망을 끌어안지도, 충분히 진보적이지도 못하다고 질타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행동들이 과연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끌어안고 진취성과 노력으로 삶을 돌파할 것을 주장하는 멘토들의 제안보다 덜 사악한 것인가.
나는 멘토의 조언이나 정치평론가의 조언이 그 자체로 선량하거나 사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인문제든 사회문제든 맥락이야 어찌 됐든 모종의 ‘결단’을 요구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정치평론가라도 친구의 사적인 문제에 대해 조언할 때는 멘토들이 한 말과 비슷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비판받아야 할 것은 ‘말’이 아니라 그 ‘말’에 대한 책임이 지워지거나 면제받는 방식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평론가는 멘토를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비평을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윤형<미디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