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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조선인’ 무국적자의 비애

입력 2010.10.20 14:24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조선국적 10만여명 양국서 다 차별받아

지난 10월 10일 오후 2시. 35살 동갑내기 부부 한쌍이 탄생했다. 신랑은 김익, 신부는 리정애. 두 사람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리정애씨가 한국에 처음으로 온 것은 지난 2004년. 2006년부터는 꾸준히 한국에 드나들었다. 그러다 2007년부터 2년간 월간 <민족21>에 연재된 임소희씨의 만화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의 주인공이 됐다. 남편과의 인연도 이 만화를 통해 맺어졌다.(☞ 「Weekly경향」 891호 ‘南男朝女의 사랑엔 국경이 있다’ 참고)

지난 10월 10일 결혼한 김익씨와 리정애씨 부부. | 김석구 기자

지난 10월 10일 결혼한 김익씨와 리정애씨 부부. | 김석구 기자

부부가 됐지만 리정애씨와 김익씨가 석관동 신혼집에서 신혼의 단꿈에 빠질 수 있는 기간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신부의 국적이 문제다. 리정애씨는 ‘조선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 3세다. 조선인 리정애씨는 현행법상 체류허가가 만료되는 11월 11일까지만 한국에 머물 수 있다. 그가 다시 한국에 오려면, 일본 오사카 영사관으로부터 여행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아야 한다.

나고 자란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국인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100년 전 강제병합으로부터 빚어진 우리 근현대사가 낳은 비극이다.

국제법상 일본에 거주하는 ‘난민’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에는 약 240만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재일동포 1세들은 대부분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초반 징용이나 징병 등의 형태로 강제로, 또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도 많았지만 2000년대까지도 50만명 이상이 일본에 남았다. 일본은 1947년 출입국관리령에 따라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외국인으로 등록하고 일괄적으로 ‘조선적’을 부여했다. 일본인에서 다시 조선인이 된 것이다.
 
문제는 1948년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조선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이들도 있다. 현재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재일동포는 약 1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나라의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 됐다. 이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난민’이다.

나라 잃은 난민 처지인 이들에게 차별은 어디에나 있다. 무국적자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여권이 없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재입국허가서를 받아야만 한다. 한국에 갈 때는 한국 정부에서 발행하는 임시여권을 받아야 하지만, 허가 기준은 남북관계에 따라 들쭉날쭉이다. 2000년 재일조선인 지문날인이 전면 폐지되기 전까지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재일조선인들은 경찰의 수배 대상이었다.

조선인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하는 일도 있다. 리정애씨 가족은 리씨만 제외하고 모두 오사카조고(조선고급학교)를 다녔다. 오사카시가 학교 운동장의 4분의 1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1952년 설립된 이 학교는 1965년 현재의 땅을 매입한 뒤 1973년에 이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전하기 직전에 시에서 학교 운동장 부지의 4분의 1이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에 포함됐다고 통고했다. 이후 이 문제로 학교와 시 당국은 교섭을 거듭하다 1997년 이후에는 잠잠해진 상태였다. 그 사이에 시 당국은 학교가 운동장 부지를 사기 위해 내건 조건을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 2005년 시가 교섭 중단을 선언하고 소송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3년을 끌어오던 재판은 2009년 11월 학교가 1억4600만 엔을 주고 땅을 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조선인학교는 세금 혜택이나 자금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일본 정부는 2010년부터 공립고 수업료를 면제하고 사립고등학교에는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조선인학교는 해당 사항이 없다.

한국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늘어
한국이라고 해서 마냥 순조롭지는 않다. 조선 국적을 지닌 재일동포들은 한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 지난해 9월에 일본에 돌아갔던 리정애씨는 그해 11월 상견례를 위해 한국에 다시 들어올 예정이었지만 모두 네 차례나 거부당한 끝에 결혼을 불과 두 달 앞둔 올해 8월에서야 입국할 수 있었다. 입국을 위한 여행증명서 발급 심사 때 리씨는 오사카 영사관 직원으로부터 “국적을 바꿀 생각이 없느냐”는 등 국적 전환을 강요하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비단 리정애씨만의 일이 아니다. 2009년 5월 재일조선인 오모씨(27)는 여행증명서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주일 오사카 한국영사관으로부터 국적 전환을 강요받았다. 오씨는 2009년 7월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13일 “재외공관에서 조선 국적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국적 전환을 강요 종용하거나 이를 조건으로 하는 관행을 시정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할 것을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권고했다”고 밝혔다.

여행증명서 발급에는 정권에 따른 남북관계 상황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 9월 29일 서울고등법원은 재일조선인 정모씨(29)가 오사카 총영사를 상대로 낸 여행증명서 발급거부처분 취소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다고 밝혔다. 

정씨는 리쓰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연구원으로 리정애씨와 마찬가지로 ‘조선적’을 갖고 있다. 참여정부 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여행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고 사정이 달라졌다. 정씨는 지난해 6월 한국에서 열리는 심포지엄 참석차 여행증명서 발급을 신청했지만 발급을 거부당했다. 외교부가 제시한 이유는 그가 1999년 대학 시절 북한을 방문했고, 2006년 참석한 학술대회에서 반국가단체인 한통련 부의장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행정소송을 내 1심에서는 승소했지만 항소심에서 패소한 것이다. 2007년에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2008년에는 7건으로 늘었고, 2009년에는 279건으로 증가했다.

리정애씨는 지난 9월 9일에 혼인신고를 했지만 혼인관계증명서를 받은 것은 8일이나 지난 후였다. 국적 문제 때문이다. 두 사람 혼인증명서의 리씨 국적란은 공란이다. 다른 외국인들의 경우에는 한국인과 결혼할 경우 체류 허가를 얻을 수 있지만, 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리씨는 그런 자격을 얻을 수 없다.

리정애씨 부부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다. 14일에는 공주에서 대백제전을 구경하고, 15일에는 전주 한옥마을에 들렀다. 신혼여행지를 국내로, 그것도 한국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리정애씨를 대신해 전화를 받은 남편 김익씨는 “일단 한국에 들어오면 일본을 거쳐야만 외국으로 갈 수 있다. 애초에는 금강산에 갈 생각이었는데 남북관계가 나빠 그러지도 못했다. 대신 우리땅 남쪽을 돌아보자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부부가 아무런 제약 없이 함께 있으려면 리정애씨가 조선적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럴 생각이 없다. 남편의 설명이다. “국적은 인권의 문제이고 선택할 자유가 있다. 여행증명서 발급을 조건으로 특정 국적을 강요하는 건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 정부가 재일조선인에게 국적 전환을 강요하기 때문에 반발심이 생기는 측면도 있다. 재일조선인들은 차별을 감수하면서도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그들에게 남한 국적을 취득하라고 한다면 분단을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셈이 된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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