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병합 유산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동북아 질서에 ‘악영향’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건은 100년 전 벌어진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 않는다. 박태균 교수는 이번 글에서 1945년 일본 패전 이후의 한·일관계사를 검토하면서 강제병합의 유산이 해방 후 한·일관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오늘날의 동북아 질서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편집자 주>
요코스카항의 일본 해군 함정. 욱일승천기가 걸려 있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99년 11개월이 지난 2010년 7월 말 일본의 해군항을 갖추고 있는 요코스카에 갔다.
요코스카에서는 세 가지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유람선을 타고 요코스카항의 해군기지를 관람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수도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고, 미 해군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람선에서 미국과 일본 해군의 최신 함정들을 자유로이 보면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놀라움은 그 유람선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곳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점검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인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지만, 한국인뿐만 아니라 센카쿠 열도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 역시 자유로이 관람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구축함과 이지스함에서 휘날리고 있는 욱일승천기는 또 다른 놀라움을 주었다. 관광상품 매장이 아닌, 일본 해군 함정에 걸려 있는 욱일승천기는 보는 이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욱일승천기는 바로 태평양전쟁 시기 대동아전쟁의 상징적 깃발로, 일본의 팽창 의지를 보여주는 깃발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과거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유산은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한국과 일본의 불행했던 과거는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어쩌면 1945년은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과 한국전쟁은 일본을 1945년 이전의 국가로 다시 돌려놓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레드퍼지(Red Purge·빨갱이 숙청)가 시작되었다. 관공서 및 학교에서 과거 좌파 경력의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 여순사건 이후 1949년에 있었던 소위 ‘빨갱이 숙청’과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국방비, 2002년 기준 한국의 3배
한국전쟁 기간 중 일본은 재무장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고, 1952년에 보안대로 재편된 뒤 1954년에는 자위대가 발족되었다. 일본의 소위 평화헌법에는 교전권 포기와 재무장 금지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는 해외에 있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해외에서까지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국방비는 2002년 기준으로 세계 5위의 수준으로 한국의 3배이며, 한국·북한·타이완을 합친 것보다 높은 수준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일관계에서 또 다른 불행을 배태하였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참여하지 못했다. 미국은 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더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이 참석하도록 노력했지만, 결국 일본의 반대로 실패했다.
한국이 승전국이 아니기 때문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 패망 직후 한국이 승전국이 아니기 때문에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한국인이 받을 자격이 없다고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명시했던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주장에 반대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을 승전국으로 인정할 경우 일본에 있는 수십만의 재일조선인들을 처리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승전국 국민으로 대우하고 싶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낳은 또 다른 문제는 독도 영유권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초안에서는 독도를 한국에 돌려주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독도는 1905년 일본에 의해 국제법적으로 등록되었다. 바로 한국이 을사늑약에 의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된 해였다. 한국 정부로서는 자신의 영토를 국제기관에 등록할 수 있는 권한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1909년 간도협약 역시 외교권이 없는 한국을 대신하여 일본이 중국과 맺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한국과 일본은 관계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이웃 나라가 과거의 불행한 일 때문에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살 수는 없었다. 그것도 냉전의 최전방에 있었던 한국으로서는 외교적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 관계의 복구가 절실했다. 미국은 한반도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한국은 부흥의 가능성이 없는 변두리 국가였다. 그러나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는, 또한 냉전 전략을 위해서는 지켜야 할 곳이었다. 그래서 미국을 대신하여 일본이 좀 더 많은 돈을 내주기를 원했다. 미국은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국교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국교정상화 과정에는 많은 암초들이 있었다. 한국은 식민지 시기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식민지 시기 일본이 한국을 발전시켜주었기 때문에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소위 ‘구보다 망언’이 있었다. 심지어 일본은 한국이 식민지 시기 한반도에 있었던 일본의 공적 재산뿐만 아니라 개인재산을 모두 몰수하였기 때문에 몰수한 개인재산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법적으로 패전국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재산은 보호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적 재산뿐만 아니라 개인재산까지 몰수한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8선 이남에 있었던 미군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박태균 교수가 일본 해군기지가 있는 요코스카항에 서있다.
워싱턴으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미군정은 1945년 12월 군정법령 33호를 통해 모든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군정 운영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재산은 1948년 9월 한국 정부로 이관되었다. 따라서 책임은 미군정에 있었고, 미국 정부가 이에 대해 유권해석을 내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인의 개인재산 문제뿐만 아니라 독도에 대해서도 어떠한 유권해석도 내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은 14년을 끌어야 했으며, 궁극적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라고하는 밀실협상에 의해 양국 간 타협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밀실협상은 한국에서 굴욕외교에 대한 전국민적 반대에 부딪혔고, 일본에서는 북한을 제외하고 한국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때문에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밀실에서 봉합한 한·일 국교정상화 외교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한국과 일본은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합의하고, 1965년 정상적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교정상화는 국가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서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켰다. 국가적 차원의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1965년 이전에 맺었던 조약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한국 측 입장은 1945년 이전에 있었던 한국과 일본의 조약은 모두 무효라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입장은 달랐다. 1945년 이전에 있었던 조약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은 조약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조약들은 조약 체결 당시에는 무효가 아니었으며, 일본이 패망한 이후 또는 1951년 전후 일본의 법적 지위가 회복된 이후에 가서야 무효가 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으로서는 배상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다.
양국간 논란이 계속되면서 양국 대표들은 국제 조약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합의를 도출하였다. 일단 협정의 문안에는 ‘이미 무효’라고 기입하되 그 해석은 양국이 서로 다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국회에 1945년 이전 한·일 간의 모든 조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입장을 전달한 반면, 일본 정부는 국제법적으로는 유효하지만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에야 그 조약들이 무효가 되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불행한 과거에 대해 어떠한 합의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식민지 시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이다. 한·일협정에는 일본이 한국에 주는 소위 ‘청구권’ 자금에 개인 보상이 모두 포함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이 신고할 경우 보상하겠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 신고하지 않았다. 왜? 일본에 끌려갔다고 하면 친일파로 낙인 찍힐 가능성이 있었다. 또 1945년 이후에도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조총련 계열의 사람들은 한국 정부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었다.
더 복잡한 문제는 위안부 문제였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1960년대 한국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신고하는 것은 곧 사형선고와 같았다. 이들이 정작 용기를 내어 배상을 요구했을 때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이미 과거에 다 처리가 된 문제라며 발뺌하였다. 한때 일본 정부가 보상을 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지만 곧 말을 바꾸었다. 한국 정부는 결국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조사를 해야만 했다.
이처럼 1965년 한·일협정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문제들은 모두 100년 전 한·일 간의 불행한 과거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다.
강제병합으로부터 100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부터 59년, 그리고 한·일협정으로부터 45년이 지난 지금 한·일관계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해 있다. 두 나라의 외교관계는 늘 껄끄럽다. 한국과 일본은 외교관계는 수립했지만 동맹관계는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이 작동하고 있지만 한·일 동맹을 규정하는 구체적인 조약은 없다. 이 때문에 한·일관계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대해 어떠한 정책을 실시하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무력 강화 끊임없이 북한 자극
또한 현재 한·미 군사동맹과 미·일 군사동맹은 동북아에서 복잡한 안보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문제와 함께 동북아 주도권을 둘러싼 중·일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은 군사력을 점점 더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헌법 개정을 통해 무장력을 갖춘 보통국가로 가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의 무력 강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북한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군사력 강화와 함께 한·미·일 세 나라의 군사적 협력을 경계해왔다. 때로는 자신들의 공격적인 대남 전략과 적극적인 핵전략에 일본 문제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등 북한이 안보위기를 일으킨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군사력 확대였다. 당시 북한은 일본 자위대의 유사시 한반도 주둔 전략을 담은 미쓰야 계획이 일본 의회에서 폭로되면서 이를 지속적으로 비난했다.
이처럼 100년 전의 불행했던 과거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도 동북아 세 나라의 긴장 어린 애증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여름 요코스카에서 본 욱일승천기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강제병합이 있은 지 100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난 2010년 9월 말 다시 한 번 도쿄를 방문했다. 비가 내리는 메이지 진쿠와 하라주쿠를 방문했다. 메이지 진쿠는 타이완과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메이지 일왕을 모신 곳이다. 젊음의 거리 하라주쿠는 메이지 진쿠 바로 근처다. 하라주쿠는 일본의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들이 일본의 군국주의나 한·중·일관계, 독도문제에 대해 무슨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일본 총리가 왜 한국에 대해 사과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까? 일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관광에 몰두하고 있던 한국의 젊은이들 역시 마찬가지는 아닐까?
100년이 지났건만 실상 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 100년 전 도쿄를 거닐던 일본인들, 식민지 경성의 명동을 걷던 사람들, 오늘의 하라주쿠를 걷고 있는 일본인들 생각 사이에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과거사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지난 100년. 해결보다는 미봉하려 했던 지난 100년.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보지 못했던 지난 100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지난 100년. 그 100년이 앞으로의 100년 또한 어둡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너무나 걱정된다. 100년 뒤에도 일본에서 욱일승천기가 휘날릴까. 욱일승천기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일본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지 못한 한국과 중국 역시 책임져야 할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