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지역 거주 조선인 사상과 행동 통제 수단으로 사용
일제 시대 간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어떤 형태로 이뤄졌을까. 간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투옥 위협도 받았지만 거주 지역에서 정치적 이유로 몇년씩 추방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양기탁(왼쪽)과 계봉우. 몸에 붙은 종이에 ‘재류금지 조선인’ 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쓰여져 있다.| 보훈처
1920년 간도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12월 10일자로 일본 외무성으로 한 건의 공문을 보낸다. 간도 연길현에 거주하고 있던 스물일곱살 조선 청년 오지화에 대한 ‘재류금지 처분에 관한 건’이라는 이름의 공문이었다. 재류금지란 해당 지역에서 거주를 제한하고 추방한다는 뜻이다. 공문은 “금일부터 향후 3년간 중국에 재류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그가 이 지역 주민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오지화는 1920년 5월 무렵부터 대한민국의민단에 가담해 군자금을 조달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대한민국의민단은 대한의군부와 함께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1920년 방우룡을 단장으로 조직됐다.
1914년 6월 28일부터 8월 29일까지 연해주 지역 <권업신문>에 안중근 의사의 전기인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집필한 역사학자 계봉우도 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재류금지 명령 집행 보고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면 간도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대단히 위험한 사상을 품고 있는 자”라면서 “이대로 방임한다면 금후 어떠한 행동에 나설지 헤아리기 어려우며 해당 지방의 안녕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향후 3년간 중국 체류를 금지하고 그를 회령 지역 헌병 분대로 압송했다.
재류금지 공문에 나오는 계봉우의 구체적 ‘혐의’는 뒤집어 보면 그가 이 지역에서 펼친 독립운동 행보를 보여주는 증거 자료다. 그는 1909년 간도 연길현으로 이주해 길동기독학당 및 광성중학교에서 역사, 지리, 한문 등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최신동국사>라는 역사 교과서를 편찬했다. 또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해 활동하면서 <안중근전>을 집필하고, 여러 차례 일본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공문은 이러한 그의 행동을 “출판을 기획한 혐의” “과격한 언동”이라고 지칭했다.
“대단히 위험한 사상을 품은 자” 보고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은 “일본, 중국 양국 간의 친선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 1918년 12월 11일 봉천 주재 일본 총영사관 명의로 발행된 재류금지 처분 문건은 “이들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 등의 의사를 동요 준동시키는 바 또한 적지 않다”면서 3년간 중국 재류 금지 명령을 내렸다. 문건에 따르면 그는 조선에서 보안법위반으로 투옥돼 복역하던 중 1917년 4월 특사를 받아 출옥,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게 배일 사상을 고취하고 이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조직하는 활동을 했다.
재류금지제도는 강제병합 이전인 1881년 8월 발생한 ‘구포 사건’이 발단이 됐다. 당시 구포 지역을 여행하던 일본상인 4명이 조선인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부산 일본인 거류지의 일본인 300여명은 거류지를 이탈해 조선인 마을을 공격했다. 이 사건이 외교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부산영사 콘도오 마스키는 문제를 일으킨 일본인들의 조선 체류를 금지하는 ‘재류금지 제도’를 마련해줄 것을 본국에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이 요청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당시 청나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로까지 통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입법을 추진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1883년 3월 10일자로 제정된 ‘청국 및 조선국 재류 일본인 취체규칙’이다. 이 규정에 따라 해당 지역 영사는 “해당 지역의 안녕을 방해코자 하는 자” 또는 “그 행위에 의해 해당 지역의 안녕을 방해함에 이르게 될 자”에 대해 1년 이상 3년 이하 재류 금지를 명령할 권한을 갖게 됐다.
양기탁에 대한 재류금지 처분 보고서. | 보훈처
애초 자국민들이 타국에서 소란을 일으켜 외교문제를 일으킬 경우에 대비해 만들어진 이 재류금지제도는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화함에 따라 식민지 주민들의 사상과 행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만인들은 1897년부터 ‘취체법’의 적용 대상이 됐다. 조선인들의 경우 강제병합된 것은 1910년이지만 외교권을 강탈당한 1905년부터 재외 거류 조선인들에 대한 관할권이 일본 재외공관에 위임되면서 이 법의 적용대상이 됐다. 1910년 6월 30일 평안북도 벽동군 출신 김시정이 청국 관헌과 결탁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일본인의 사업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최초로 재류금지 처분을 받은 이후 간도, 봉천, 지부, 천진, 상해 등 각지에서 ‘안녕 방해’ 또는 ‘풍속 괴란’의 이유로 조선인들에 대한 재류금지 처분이 이어졌다.
대만인과 조선인을 포함해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제국의 ‘신민’에 대한 재류금지는 일본의 식민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더욱 정교화했다. 조선, 대만, 남양군도, 치외법권을 보유한 중국 내 영토 등으로 지역적 범위가 확대되고 지역 간 공백을 막기 위해 법제가 촘촘해졌다.
청일전쟁 승리 후 대만인도 적용
조선과 만주, 만주와 관동, 중국 복건성 지역과 대만 등은 지리적으로 서로 인접한 탓에 한 지역에서 재류금지를 당하더라도 인접지역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으므로, 재류금지의 효력이 미미했다. 일본은 이러한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각 관할지역 간의 연계를 강화했다. 한 지역에서 재류금지 처분을 받은 자들의 명단이 이웃한 지역의 관할책임자에게 통지돼 해당 인물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 그 지역에서도 자동적으로 체류를 금지하도록 한 것이다.
재류금지 제도가 식민지인들의 해외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1996년부터 2001년에 걸쳐 출판된 일본 ‘외무성 경찰사’를 비롯한 일본측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27년 사이 간도 지역에서 조선인에게 내려진 재류금지 처분 129건 중 119건은 민족운동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었다.
지난 2008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던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류금지 처분 보고서를 수집해 번역한 이승엽 교토대 연구원에 따르면, 재류금지 처분은 △형사소추에 비해 훨씬 용이하다는 점 △소추를 통한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더라도 피의자의 해당 지역 거주를 봉쇄할 수 있다는 점 △조선총독부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 피의자를 재류금지 처분에 의해 자동으로 조선총독부 재판소에 회부할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남발됐다. 조선총독부 재판소에 회부할 수 있었다는 점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조선인 사상범을 전문으로 다루는 조선총독부 재판소 검사국이 피의자를 취조하고 기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