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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길을 쫓아 렌즈에 담다

입력 2010.10.13 14:47

다산의 후반생

글과 사진이 동행하는, 90여 컷의 사진 예술은 다산의 후반생 36년의 인생길을 슬프게 펼쳐 보인다.

다산의 후반생 / 차벽 / 돌베개 펴냄

다산의 후반생 / 차벽 / 돌베개 펴냄

“북풍에 눈 날리듯 / 남쪽 강진의 밥집까지 밀려 왔네. / 다행히 조각산이 바다를 가려 / 총총한 대나무로 세월을 삼는구나. / 옷이야 남녘이라 겨울에도 덜 입지만 / 근심이 많아서 밤에 술을 더 마시지. / 한 가지 일이 나그네 걱정 겨우 잊게 해주니 / 동백이 설도 전에 벌써 꽃피운 거라네.(‘객지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쓰다’)”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했던 다산 정약용은 적극적 지지자였던 정조 대왕과 정승 채제공이 사망한 뒤,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 땅으로 유배를 떠났다. 당시의 지배세력인 노론은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내쫓기 위해 적당한 죄목을 찾던 중 천주교라는 기막힌 건수를 찾아낸 것이다. 다산은 비록 정조 생전에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어떻게든 옭아 넣으려는 그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형이 이승훈이었고, 외종형이 윤지충이었고, 그의 셋째형이 정약종이었다. 이들은 1801년 신유사옥 때 모두 죽임을 당했다. 다산은 정조 승하의 슬픔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유배의 길에 올랐다. 다산에게는 비극이었지만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 된 유배생활 18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것 말고는 다산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프로 사진작가이자 아마추어 다산연구가가 글과 사진으로 <다산의 후반생> 36년을 답사했다. 다산이 쓴 시와 산문을 읽으며, 다산이 걸었던 길을 쫓아 카메라 렌즈에 담아냈다. 그간 학계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고증해가며 절묘하게 문학적 상상력을 더했다.

글과 사진이 동행하는, 90여 컷의 사진 예술은 다산의 후반생 36년의 인생길을 슬프게 펼쳐 보인다. “나는 임술년(1802) 봄부터 곧 저술을 업으로 삼아 붓과 벼루만을 곁에다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았다. 그 결과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마침내 폐인의 지경에 이르고, 시력이 아주 어두워져서 오직 안경에만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느냐?(‘두 아들에게 보여 주는 가훈’ 중에서)” 오로지 학문의 길이 성인의 길이었다.

유배 18년, 해배의 성은이 도착했다. 1818년 9월 14일 다산은 아들과 제자들과 함께 우마차를 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와 저술한 600여 권의 책, 초서한 자료 등을 다 갖고 올라왔으니, 우마차 가득 짐을 실었을 것이다. 18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다산은 큰형님 정약현과 함께 부모님의 묘소에 참배를 갔다. 하지만 해배가 곧 영광은 못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입신양명을 꿈꾸는 유학자의 도리에도 힘들었다. 1830년 딱 한번 조정의 부름이 있었다.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가 위독하자 다산을 부른 것이다. 탕제의 일이었다. 다산이 제조한 약을 먹고 효명세자가 죽는다면 다산은 책임을 져야 했고,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불충이었다. 다산이 필요한 약재를 가져오라고 백리 길이 넘는 마제 집으로 사람을 보내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효명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임시직이었던 다산의 벼슬도 날아갔다.

강진 유배 시절 다산에게는 홍임이라는 딸과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과 딸이 다산초당에 함께 기거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다산이 강진을 떠날 때 딸 홍임은 8~9세 정도였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해배 후 부인 홍씨와의 사이가 한동안은 불편했을 것이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의 결혼 60주년 회혼잔치에 맞춰 ‘회근시’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회혼잔치 날 아침 다산은 영면에 들었다.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새 굴러 왔지만 /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네. /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겠지. / 오늘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 나눠졌다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회근시’)”.

최재천<변호사> cjc4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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