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어서 오랜만에 오래된 책장을 들쳐본다.
책장 사이로 낡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성장의 시절, 글은 길만큼이나 외로웠다. 우리는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길이 주는 영원한 물음이다, 길을 가도 좋고 굳이 그 길을 가지 않아도 좋다. 책을 펼치면 길이 보이고 길을 나서면 글이 떠오른다. 가을, 글을 찾아 떠나는 두 길.
오정희 ‘중국인거리’ - 인천 차이나타운
* 그 이방의 거리
시(市)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려졌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貨車)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가루를 흘려보냈다.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거리’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래서 중국인거리를 찾아가는 길은 가급적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 제격이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인천역에서 석탄가루마냥 부려지면 곧바로 이방(異邦)의 거리와 마주친다. ‘중화가(中華街)’라 쓰인 높다란 패루를 지나면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인물들을 만난다. ‘서성 왕희지 상’과 ‘성인 공자 상’, 거리의 한쪽 벽면을 메운 ‘삼국지’의 인물들, 게다가 과장된 용마루에 자색과 금색으로 가득한 집들, 치파오와 홍등, 재스민 향보다 더 진한 중국음식 냄새, 여기는 이른바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옛날 청관이 있던 자리에서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발 아래로 어색한 중국풍이 멀리 부두에까지 이른다.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언덕을 넘어 선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초라하게 그러나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역사와 남겨지지 않은 기록의 추측으로, 상상의 여백으로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있었다.
작가가 소설 속에 그린 풍경은 전후 인천이라는 작가의 유년시절 풍경이었지만, 그 풍경은 우리의 유년시절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지금의 이곳 풍경 역시 그 휘황한 칠만 벗겨내면 금방이라도 본색으로 돌아갈 것만 같기도 하다. 골목길을 몰려다니는 새카만 아이들과 부두에 버려진 고양이, 서모와 계모, 장궤와 양공주, 탄가루와 해인초 냄새, 공설운동장의 정치구호와 성당의 종소리… 그리고 나머지는 상상의 여백인 것조차.
조명판처럼, 혹은 무대의 휘장처럼 희게 회칠이 된 한쪽 벽만 고스란히 남아 서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치옥이가 소곤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곧 무너질 것이다. 나란히 늘어선 인부들이 곡괭이의 첫날을 댈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희고 거대한 벽은 굉음으로 주저앉으리라.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초로 자장면을 만들어냈다는 공화춘은 이제 회색 뼈대로만 남아있다. 진흥각이니 자금성이니 중화루니 그 명맥을 이어가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자장면이 ‘꿈의 외식’이었던 시대는 분명 아니다. 이제 호화로운 청루에서는 본격적인 청요리를 마음껏 선보인다. 하다못해 중국식 정통만두를 빚어내는 식당의 입구에는 ‘자장면 없습니다’라는 문구까지 붙어 있다. ‘짜장면’이 아닌 자장면, 그조차 그 잘난 정통에 밀려 ‘형편없는 짜장’ 신세가 되어버린 채 신화와 전설은 이제 가뭇없이 추억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일까. 마치 휘황한 ‘금’과 ‘적’ 속에 ‘애환’이 파묻혀버린 지금의 차이나타운처럼.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이 지역이 청국의 치외법권지대로 지정되자 이 땅에 있던 화교들이 몰려들면서 생성되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 5000평의 부지에 청국의 영사와 학교가 설치되고 중국의 산동반도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배가 운항하면서 화교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식료잡화, 소금, 곡물을 팔아 사금 등을 사들여 중국으로 보내면서 상권을 장악,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청관의 상권이 마비되자 많은 화교들이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요릿집과 잡화상으로 연명하거나 일부는 부두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대우로 화교사회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1949년 중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외 이동이 금지되자 화교사회는 더욱 쇠퇴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공원의 꼭대기에는 전설로 길이 남을 것이라는 노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선창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의 깃발이 색종이처럼 조그맣게 팔랑이고 있는 사이 기중기는 쉬지 않고 화물을 물어 올렸다. 선창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섬처럼, 늙은 잉어처럼 조용히 떠있는 것은 외국 화물선일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차이나타운이 있는 언덕받이 공원에는 또 다른 이방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원래 만국공원이었다. 따로 조계(租界)를 차지하고 있던 청국과 일국을 제외한 서방국가들이 모여 살던 각국 조계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유공원은 철저히 외세에 의해 조성된 외국인을 위한 휴게공간인 셈이었다. 120여년이 지난 후, 외세도 물러가고 전쟁도 끝났건만 이번에는 남겨진 동상을 놓고 자국민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동상의 철거를 놓고 보수와 진보 간에 벌어진 힘겨루기였다.
오정희의 ‘중국인거리’는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나’는 전후의 신산한 삶 속에 ‘이방의 거리’로 이주되어 온다. ‘나’는 학교가 파하고 나면 또래들과 제분공장의 밀을 훔쳐 먹고, 화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조개탄을 훔쳐내고, 미용사를 꿈꾸는 치옥이와 함께 거리를 싸다니며 아무 데서나 찍찍 침을 뱉어댄다. 중국인을 보면 ‘아편쟁이’니 ‘뙈놈’이니 욕을 해대기도 한다. ‘나’는 푸줏간에 가서 시비를 하고, 이발소에 가서 이발사에게도 되바라지게 악다구니를 해댄다. 그러는 사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중국인의 시선을 느낀다. 치옥의 어머니는 계모이고, 언니 매기는 미군과 함께 살면서 미국행을 꿈꾼다. ‘나’의 할머니는 서모이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난산 끝에 여덟번째 아이를 낳는다.
나는 다시 손안의 물건들을 나무 밑에 묻고 흙을 덮었다. 손의 흙을 털고 나무 밑을 꼭꼭 밟아 다진 뒤 일정한 보폭(步幅)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며 장군의 동상을 향해 걸었다. 예순번을 세자 동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두 계절 전 예순다섯 걸음의 거리였다. 앞으로 다시 두 계절이 지나면 쉰 걸음으로도 닿을 수가 있을까. 다시 일년이 지나면, 그리고 십년이 지나면 단 한걸음으로 날으듯 닿을 수가 있을까.
소녀의 되바라진 행위나 이유 없는 메슥거림, 까닭 모를 아릿함이 사실은 모두 성장통(成長痛)이었다. 아이는 이방의 거리처럼 낯설고 두려운 세상 속에서 통증을 겪으며 자라난다. 그 아픔의 깊이만큼 아이는 성장한다. 우리가 지금 차이나타운에서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국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그 속내에 깊이를 이루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다. 이방에서 이방들이 이루어온 삶의 궤적이나, 아직까지도 어엿이 이어지고 있는 삶의 풍정들은 우리에게 성장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아픔의 시간을 딛고 지금 우리는 얼마만큼 성장해 있는가.
김승옥 ‘무진기행’ - 순천만
*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남해고속도로 순천IC에서 길을 내리면 ‘무진(霧津)’이란 팻말 대신 ‘순천만 갈대밭’으로 가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렇지만 정말 한 10여㎞를 달리면 그 곳은 말 그대로 ‘안개나루’다. 밤새 물을 건너온 안개가 스물거리며 진주(進駐)해 있는 곳. 대대포의 아침은 안개를 뚫고 열린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나는 새벽녘 이 안개 속에서 무엇을 보기 위해 왔는가.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무진은 고향이다. 그것도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不眠)을 쫓아보려고 행하던 수음(手淫)과 곧잘 편도선을 붓게 하던 독한 담배꽁초와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함 따위’ 속에나 있던 고향이다. 비록 출세는 하였지만 그의 귀향은 금의환향이 아니라 무위(無爲)로의 여행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무표정하게 유행가를 부르는 음악선생이다.
결국엔 나와 여자만이 남았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검은 풍경 속에서 냇물은 하얀 모습으로 뻗어 있었고 그 하얀 모습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무진교’를 건너서 갈대밭의 끝 ‘용산전망대’로 간다. 키 큰 갈대숲을 헤쳐가면, 그곳에서 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윽고 갈대밭이 끝나면 그곳은 바다다. 그리고 남은 안개가 걷히고 사위가 드러나면 밤새 갈대숲에서 추위에 떨던 새들이 하늘 끝으로 날아오른다. 사람들은 채 마르지 않은 몸으로 배에 오르고, 배는 갈대의 수군거림을 헤치며 저어간다.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사실 해가 멀쩡하게 떠오르고 난 다음의 갈대밭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갈대의 서걱거림은 왠지 을씨년스럽고 ‘숨어 우는 바람소리’에 몸은 공연히 움츠러든다. 해가 떠도 쓸쓸하기만 한 그 풍경 속에서 문득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빈속을 채우기 위해서 어디론가 바삐 떠나간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 여자는 서울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그 여자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는 문득 그 여자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대대포에서 순천만을 끼고 서쪽으로 달리면 그리 머지않아 화포가 나온다. ‘꽃’의 포구인지 ‘불’의 포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늦가을의 쓸쓸함만이 남았다. 봉화산 밑의 소금밭은 그냥 갯빛으로 널브러져 있고, 늙은 어부는 하릴없이 배를 선착장 쪽으로 마냥 끌어당긴다. 길을 내쳐가면 여자만 깊숙이 꼬막으로 유명한 벌교가 나오지만, 늦가을의 마지막 빛이 마저 그리운 나는 다시 순천만을 되돌아 여수의 화양반도를 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화양반도의 반대쪽 가랑이, 돌산의 끝자락 임포 향일암 아래로 잦아든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방문을 열고 물결이 다소 거센 바다를 내어다보며 오랫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임포에서의 하룻밤은 어수선해도 다행히 지난 몽정의 밤을 지우기라도 하듯 향일암에 해가 뜬다. 나는 바다로 떠오르는 해를 보지 않는다. 어디선가 유숙의 밤을 지새웠을 연인들의 낯빛에서 해를 본다. 숨기지 않는, 숨을 필요가 없는 사랑은 아름답다. 그들은 이제 방죽포로, 무슬목으로, 오동도로, 만성리로 여수반도의 동쪽자락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청춘을 구가하리라.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그 음악선생이 대학 졸업연주회 때 불렀던 노래가 ‘어떤 개인 날’이라고 했던가. 아니, ‘어떤 개인 날’이면 어떻고 또 ‘목포의 눈물’이면 어떤가. 추억 속에 갇혀 있을 때 모든 노래는 그리움으로 서럽다. 청춘의 구가를 뒤따라갈 때 그 빛은 부러움으로 무겁다. 나는 이왕 추억으로 뒤처진 김에 광양만을 돌아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로 빠져 배알도 앞 그 어둔 바다에서 자기로 했다. 거기 한 점 전어 굽는 냄새에 스산한 취기를 달래보리라. 다시 순천을 빠져나오는데, 뉘엿한 가을햇볕이 뒤따라오고 있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