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앞장 볼세비키 혁명가 권오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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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앞장 볼세비키 혁명가 권오설 (상)

입력 2009.06.23 00:00

동맹휴업 주도 중학교 퇴학 당해

[현대사 아리랑]6·10만세운동 앞장 볼세비키 혁명가 권오설 (상)

공산당원 150명 피검
권오설씨는 옥사 다수 민중은 학살
드디어 그날은 왔다. 이날 신문사 기빨을 단 자동차 수십 대에 지도부대가 논아 타고 삐라는 청년과 학생들이 난우어 가지고 행열의 양쪽에 대기하였다. 오전 10시 행열이 창덕궁을 떠나자마자 파조교(罷朝橋)에서 삐라는 산포되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는 시위가 벌어졌다. 군중과 경찰 사이에는 각처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학생 수십 명은 그 자리에서 검거되였다. 제2차 시위는 관수교(觀水橋) 건너서 제3차 시위는 황금정 3정목에서 제4차는 훈련원에서 제5차는 동대문에서 제6차는 안감천(안암동)에서 연달아 일어나는 시위대의 지축을 흔드는 만세소리는 행열과 같이 끝일줄 모르고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든 것이다. 장의 이튿날부터는 검거선풍이 온 장안을 휩쓸어 운동 지도부 이외의 군중 200여 명이 피검되였고 선풍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여 6월 말까지에 수천 명의 근노인민이 투옥당하고 검속된 공산당원만 150명의 다수에 올랐다. 이것이 세칭 제2차 공산당사건이다. 이때에 검거된 공산당원은 악독한 경찰의 손으로 학살을 당하고 권오설씨는 옥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근로인민대중의 혁명적 기세는 점점 더 불타오르고 소작쟁의 노동쟁의 학생맹휴의 투쟁은 계속하여 나타났든 것이다.

<독립신보> 1947년 6월 10일치 기사이다.
‘민족의 자랑 6·10만세 기념일’
‘조선공산당 영도 아래 이조 최후 왕 국장일에 반제항쟁’이라는 제목이다.

모든 인민이여 귀를 기우려라- 들려오지 않는가 노동자 농민을 전위로 한 인민들의 일제의 항거하든 우렁찬 발자국 소리- 이 강산을 진동시킨 ‘조선독립만세’의 고함소리- 이날이 바로 지난 21년 전 일제와 가장 용감히 싸운 조선공산당에 영도 아래 노동자 농민을 전위대로 한 학생 소시민 등 모든 조선인민이 독사 같은 일제의 눈초리와 총칼 밑에서 잔악한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독립만세’ ‘토지를 농민에게’ ‘애국자 혁명가를 석방하라’ 하고 과감히 궐기한 조선해방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제21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일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노동자가 일어섰다. 농민도 궐기하고 학생도 소시민도 지식층도 일본의 주구 이외의 조선인민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이날 전인민의 무자비한 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만세소리의 폭풍은 전선 방방곡곡을 휩쓸었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열사 22명 중 한명
감방에서 눈을 감은 권오설을 기리는 글이 있다. <해방일보> 1946년 4월 17일치는 앞뒷면 모두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만세!’라는 큰 제목 아래 공산주의운동에 몸바치다가 돌아간 혁명열사들 살아온 길을 적고 있는데, 22명 가신 님 가운데 권오설은 김재봉·강달영 다음으로 세 번째이다. 손톱만한 사진도 박혀 있는데, 흐리마리한 사진이지만 한일자로 꽉 다문 입에 주욱 찢어진 눈매며 기름한 얼굴이어서 여간 어기차 보이지 않는다.

권오설 동지
1897년 경북 안동군 동학가(東學駕) 밑 일 빈농가에서 탄생하였다. 동무는 생래로 총명 예지 성장하면서 그의 불타는 정열과 의분에 넘치는 기개는 후일의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영웅투쟁에서 십분 발휘되였다. 유소시부터 ‘조선독립’을 위하야 노력과 ‘일본제국주의 박멸’을 위한 투쟁은 비록 34년의 일생이 길지는 안치마는 그의 투쟁이 역사상에서 거대한 자리를 점령하고 있음을 부인치 못할 것이다. 중학시대부터 ‘조선역사연구회’란 명칭 하에 조선민족 사상의 고취와 친일선생 배척 급 동화적 노예교육 반대를 조건으로서 동맹휴학을 하였는데 이것을 도화선으로서 학교당국과 투쟁은 치열화되야 결국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당하야 광주에서 민중시위 운동에 참가 지도하다가 피체 이것이 동무의 첫 영어생활이다. 그후 교육문화사업에 열중 풍산소작인 조직지도 1924년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과 동시에 중앙상무위원으로 각 도의 소작쟁의 급 노동쟁의를 지도하였는데 그 중에도 풍산소작쟁의 밑 암태소작쟁의와 대동인쇄공파업 경전승무원파업 등을 동무가 직접 지도하였고 1925년 전조선민중운동자 대회를 소집 준비함에 동무의 노력이 지대하였고 공당 급 공청의 창립을 위하야 김재봉 박헌영 등 동지로 더부러 적극 노력하였고 공청중앙 조직부 책임자로 있다가 12월 박헌영 동지의 피검 후 공청중앙 책임비서로서 또 공당 중앙위원으로서 있으면서 1926년 이척(李 )의 장일을 기하야 전조선 민족을 통일식혀 해방전쟁을 획책하였다. 이것이 곧 6월운동인 것이다. 동무는 피검 후에도 옥중생활을 통하야도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것이 일관적 정신이며 조선을 위하야 살고 조선을 위하야 죽는다는 것이 동무의 일편단심이었다. 동무는 죽엇스나 동무에 사업은 계속되고 있다.

권오설(權五卨)은 안동권씨 제바닥인 경북 안동(安東)에서 스러져가는 잔반(殘班)댁 자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서당을 열어 떠꺼머리 아이들이 바치는 강미(講米)로 끼니나 잇는 가난도 비단가난이었는데, 아우가 언니 못지않게 어기찬 주의자 권오직(權五稷, 1906~?)이다. 아버지가 대가집 사랑채 빌려 세운 남명학교와 물도리동에 있는 동화학교에서 중등과정을 배웠다.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1916년 끝 무렵 벌어진 송년회 자리에서 민족사상을 부추기다가 쫓겨났고,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배움비발을 댈 길 없어 그만두었다.

조선노동총동맹 풍산소작인회 대표
1919년 3·1운동에 들었다가 왜경에게 쫓겨 내려간 옛살라비에서 풍서면 원흥학술강습회와 일직면 일직서숙 선생 노릇을 하였다. 1920년 안동청년회에 들어갔고, 일직면에 금주모임을 얽고 회장이 되었다. 1923년 11월 풍산소작인회를 얽는데 들어가 집행위원이 되었고, 사상모임인 화성회(火星會)를 짜는데 들어갔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세워질 때 풍산소작인회 대표로 들어가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때쯤 ‘꼬르뷰로’ 곧 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에 들어가 노농총 야체이카를 맡았다. 그리고 남녘땅을 돌며 노농총에 들어온 두럭들에 힘을 불어넣으며 여러 노동·농민 동아리들을 노농총에 들어오도록 힘썼다.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소작쟁의에 손붙이면서 대동인쇄주식회사 파업과 경성전기회사 전차승무원 파업을 이끌었다. 화요회 상무집행위원, 혁명청년당 당원, 불꽃사(火花社) 동인, 무산자동맹 맹원, 한양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으로 뜨겁게 움직였다. 1925년 2월 화요회가 채잡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니, 김재봉·홍덕유·김단야·김찬·민태흥·박일병·윤덕병·장지필·구연흠·이석·진병기·최원택·임형관·백광흠·강달영·방응모·이준태 같은 72명과 함께였다.

1925년 4월 18일 경성부 훈정동 4번지 박헌영 집에서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서 권오설은 박헌영, 김단야, 박철환(朴鐵丸, 조봉암), 홍증식, 신철수, 김찬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모임 대표는 김찬. 12월 책임비서가 되었고,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같은해 4월 25일 대한제국 마지막 순종황제가 붕어하자 인산(因山)날인 6월 10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밑그림을 그리고 선전선동문을 만든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에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권오설 추모 기념비.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권오설 추모 기념비.

상해에 있던 김단야가 6·10만세운동을 채잡고자 돌아와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갔다. 김단야는 ‘통곡하는 민중에게 격(激)함!’이라는 시위를 부추기는 글을 썼고, 권오설은 그것을 천도교인이며 노농총 맹원이었던 박래원(朴來遠)에게 주어 박아내게 하였다. 그리고 의암(義庵) 종손으로 천도교에서 펴내던 <개벽(開闢)> 책매는 이였던 손재기(孫在基) 집에 감춰두었다. 그때에 일제 입맛에 거슬리는 글이 실린 <개벽> 6월호가 덮잡히게 되었다. 종로서 왜경들이 천도교당 안에 있는 ‘개벽사’를 뒨장질하고 돌아간 다음에도 혼자 숨어 천도교 구린 데를 캐내려던 하늘 밑에 벌레가 있었다. 조선인 왜경 최준호(崔俊鎬)라는 자였는데, 손재기 집 안방에서 주고받는 말을 엿듣게 된다.

“요번 인산날에는 참말로 큰 난리가 날 거라던데 큰일났구먼.”
어떤 아낙 소리였고, 손재기 딸인 14살짜리 손정화(孫貞華)가 말하였다.

“난리가 나고 말고지요. 저것 좀 보셔요. 저 벽장 속 버들고리와 궤짝에 무엇인가 잔뜩 들어 있는걸요.”
천도교당에 들어서던 박래원이 잡히면서 경성일보 인쇄공으로 격문을 박아내었던 민창식(閔昌植) 안국동 집에 있던 인쇄기도 덮잡혀 갔고, 권오설이 머무는 곳까지 뽕나버렸다. 겨우 길돈닢이나 마련하여 머물던 곳을 나서는데 형사대를 이끌고 온 미와(三輪) 경부가 삵의 웃음을 보였다. 그때에 두 팔을 척 내밀며 권오설이 하였다는 말이다.

“욕들 보외다. 나 하나 잡으려고 여러 사람이 애쓰는 모양인데, 잡아가시오.”
6월 10일 인산날이 되자 돈화문 앞에 엎드려 슬피우는 수수천 명 흰옷 입은 조선 백성들 머리 위로 권오설이 징거두었던 격문들이 꽃잎처럼 흩날렸고 사람들은 목이 터지라고 만세를 불렀다. 긴한목마다 박혀 있는 주의자들이 채잡는 가운데 여러 전문학교와 고보생들 좇아가며 만백성들이 불러대는 만세소리에 경성시내 안이 온통 죽끓듯 하였으니, 3·1운동 때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조선인민보> 1946년 6월 1일치에 실려 있는 임화(林和) 시이다. ‘청년의 6월 10일로 가자’

손을 잠그면
어른거리는 별 거림자에도
어린 마음은 조리었으나

죽은 王者를 爲해서가 아니라
산 同胞의 自由를 爲하여
싸홈의 뜨거운 씨를 뿌리든

수무해前 六月十日

抗日戰線의 긴 隊列로
默默히 걸어가든 靑年의 가슴속엔
祖國의 첫녀름 하날이
먼 바다처럼 푸르러

아아 죽엄도
오히려 황홀한 榮光이었든
永遠한 六月十日을 爲하여

南朝鮮政府의 龍床을 어르만즈며
外國商館의 늙은 머슴이
꿈꾸는 榮華를 爲해서가 아니라
또 다시 奴隸가 되려는
同胞의 위태로운 自由를 爲하여

젊은 동무여
또 한번 죽어도 오히려 깃거운
靑年의 六月十日로 가자

六月九日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