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결성 조선문학 헤게모니 잡다
해방을 맞아 거리로 나온 사람들.
천지를 뒤덮을 듯한 ‘해방조선’의 만세! 지축을 진동할 듯한 ‘일본제국의 타도’의 보무! 그리고 ‘조선공산당재건만세!’의 함성과 연합군 환영의 흥분! 지난 9월 11일 정오경부터 ‘건준’ 주최로 경성운동장에는 부내와 영등포의 공업지대에서 화학, 금속, 기계, 철도, 체신, 토목, 출판, 섬유 등 각 산업별 남녀 노동조합 회원을 비롯하여 청년, 학도, 시민 등 기외 근로인민대중 1만수천 명이 참집하여 각각 대 기와 ‘스로-간’의 깃발을 때마침 비내리는 하늘 높이 휘날리면서 광화문을 거쳐 총독부를 휘돌아 동 오후 4시경에 해산하였다. 이날 근로대중들의 불타는 듯한 투혼과 강철 같은 단결의 힘은 여실히 발휘되어 일찍이 볼 수 없던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일반 시민과 연합군에게도 우리들의 위력이 깊이 인식되었다. 또 이날 야수와 같은 일본제국주의 경관의 흉탄에 맞아 건국의 초석으로 사라진 연전 학도 두 동지의 유해를 모신 학도대의 엄숙한 장렬도 합류하여 더욱 이날의 시위행렬을 뜻깊게 하였다.
<해방일보> 1945년 9월 19일 창간호 기사이다. ‘조선공산당 통일재건 만세!’ ‘조선인민공화국을 절대 지지하자!’는 커다란 활자가 박힌 2면 1쪽짜리 타블로이드판 일간지이다. 이날의 가슴벅참을 읊은 임화 시가 있다. ‘9월 11일’이라는 제목이고 부제가 ‘1945년, 또 다시 네거리에서’이다.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首領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鋪石마다 널린
서울ㅅ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窓도
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鐘路ㅅ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여드는
千 萬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골
찬 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든 旗ㅅ발
자꾸만 바라보며
사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가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카프’가 없어지면서 임화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되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일제 윽박지름이 아무리 모지락스럽다지만 민족의 원수요 계급의 원수며 문학예술의 원수인 일본제국주의에 무릎꿇었다는 데서 오는 비꾸진 마음으로 시 또한 처음 때 추상적 다다풍으로 뒷걸음질하던 임화였다. 그러던 임화가 8·15를 맞으면서 한창 때 서슬과 스스로 믿는 마음을 되찾게 되니, 이 시가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닥쳐올 제 한살매를 지레짐작하는 듯한 슬픈 가락이 눈에 밟히지만, 문득 한물 때 ‘단편서사시’ 가락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해방을 기뻐하는 민중들.
8·15를 맞아서 가장 힘차게 움직였던 것이 임화였다. 김남천(金南天)·이원조(李源朝) 같은 이들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얽은 것이 8월 16일이었으니, ‘준비된 문건’이었다. 8월 18일 ‘문건’ 위 모임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얽고 이들 모임을 채잡는 문학론으로 내놓은 것이 ‘인민적 기초 위에서의 민족문학’이었다. 12월 ‘문건’과 ‘예맹’을 뭉뚱그려 ‘조선문학가동맹’을 얽는 데 앞장서 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니, 조선문학 헤게모니를 잡게 된 것이었다.
‘문맹’에서 차린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조선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라는 밑가락 연설을 하였고, 문화부문 통일전선체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을 얽어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항쟁’시만을 모은 제2시집 <찬가>를 펴내고 1938년 펴내었던 처녀시집 <현해탄>을 <회상시집>이라는 이름으로,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조카 조벽암(趙碧巖)이 세운 건설출판사에서 박아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을 깊어지게 한 ‘문학에 있어 봉건적 잔재와의 투쟁임무’ ‘문학의 인민적 기초’ 같은 문학을 이끄는 길을 내보였다. 47년 미군정 뒷받침을 받는 극우테러단의 좌익신문사 습격과 시인 유진오(兪鎭五) 구속, 시낭송 원고 검열, <찬가> 판매금지, ‘문화공작대’ 피습, 좌익인사 검거선풍이 도를 더해 간다. 더 이만 서울에 있을 수 없는 셈평이 된 것이었다.
1947년 월북, 황해도 해주에 머물러
45년 11월 이기영과 한설야가 올라갔고, 46년 3월 박세영(朴世永)이 올라갔으며, 6월에는 이태준이 올라갔다.
임화가 월북한 것은 47년 10월쯤이었다. 비슷한 때에 오장환(吳章煥) 또한 월북하였는데 같이 갔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임화가 간 곳은 평양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였다. 남로당 윗선 목대잡이가 있는 그곳에서 제1인쇄소를 책임맡아 <민족조선> <인민조선> 같은 여러 간행물과 팸플릿을 찍어 남으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장사꾼들이 오갔고 길잡이만 붙이면 38선을 넘나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46년 3월 15일 비롯된 남북 우편물 교환은 6·25 사흘 전까지 개성·여현역을 거쳐 주 1회쯤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북조선에 보낼 편지는 ‘38우편물’이라고 불렀다. 그 겉봉에 ‘38 이북’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도록 했는데 이 ‘38우편물’도 여느 우편물과 같이 전국 우체국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남조선 노동당이 이름만일망정 합법정당이었던 것은 49년 끝무렵까지였다.
청년시절 임화.
목대잡이들이 모두 월북한 ‘문맹’에는 소설가 박찬모(朴贊謨)가 위원장 몸받아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해주에서 내려보내는 임화 분부에 따라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었다. 해주에 있으면서 임화는 ‘인민항쟁가’ 같은 노랫말들을 지어 내려보냈고, 남조선음악동맹 위원장이었던 작곡가 김순남(金順男)이 곡을 붙인 이 노래들은 입산투쟁을 벌이고 있는 재산인민유격대를 비롯한 남로당 사람들 신바람을 북돋아주는 북소리 같은 것이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온 임화는 ‘조선문화총동맹’을 얽고 그 부위원장 자리를 맡는다. 그때 8닢 시를 묶은 전선문고 <너 어느 곳에 있느냐>라는 시집을 내었다고 한다. 백철(白鐵)이 임화를 보았던 느낌이다.
“…불과 2~3년간에 임화의 모습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머리가 반백에 가깝게 흰머리가 많이 생겨난 일이다. 임화와 나는 나이가 동갑이니까 그때 아마 마흔다섯 정도였을 터인데 얼른 보면 50이 넘은 노신사의 풍모였으니 거기 가서 그렇게 팔자가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림화 조쏘문화협회 중앙위원회 전 부원장’.
“그는 1935년 일제경찰과 야합하여 혁명적 문화단체인 카프를 해산시키도록 책동하였으며 친일 ‘문인보국회’ 리사의 직위에 있으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소위 내선일체의 사상을 주창하는 등 민족반역 행위를 감행하여 왔으며 8·15해방 후는 미국 정탐기관의 밀정으로 가담하여 리승엽 등과 련계 밑에 간첩행위를 감행한 자로(…) 1951년 8월에는 무장폭동음모 활동에 참가하여 폭동음모 본부를 조직하고 폭동시 조일맹과 같이 정치 및 선전선동조직 책임을 담당하고 그의 역량 집결을 위하여 문화예술 단체를 자기들의 수중에 장악하려고 활동하였다.”
리승엽이 짠 박헌영정권에서 문화교육상을 맡는 것으로 되어 있는 임화가 처형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사형판결을 받은 53년이라는 설도 있고 그 2년 뒤에 있은 박헌영재판에 증인을 선 다음이었다는 설도 있다. 1920년대 뒤판부터 1940년대에 걸쳐 우리 민족문학운동의 사북에 서 있던 임화는 두 권 시집 말고도 우리 근대문학사를 나름의 과학적 방법론 자리에 서서 간추린 <조선문학사>가 있다.
북한서 간첩혐의 받아 ‘형장의 이슬’로
임화가 엮은 <조선민요선>.
지하련은 1948년 끝 무렵 처녀창작집 <도정(道程)>이 나오는 것을 본 다음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6·25때 만주로 피난해 있다가 뒤늦게 임화가 잡혀갔다는 소문을 듣고 평양으로 달려왔을 때, 임화는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거의 실성상태가 된 지하련은 치마끈도 제대로 매지 못한 반미치광이 모습으로 알 만한 사람들이 있는 기관이나 단체를 수소문하여 돌아다니다가 내무서원에게 붙잡혀 평북 희천 근처 산 속에 있는 교화소로 끌려갔는데, 1960년 첫 무렵 앓다죽었다고 한다. 임화와 지하련 사이에 태어난 남매 살매는 알 길이 없다. 임화가 노랫말을 쓴 ‘해방조선의 노래’이다.
1.전사들아 일어나거라
영웅들아 일어나거라
압박의 사슬은 끊어지고
자유와 희망의 새날이 왔다
일어나거라 전사들아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2.서백리아 바람 찬 벌판
현해탄의 거친 파도에
한 많이 쓰러진 수없는 생명
旗ㅅ발은 벌거니 피에 젖었다.
잊지 말아라 혁명 동지를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3.등불도 없이 걸어오던
눈물도 없이 울어오던
어둔 밤 우리의 머리 위 높이
호올로 빛나는 그대들 이름
높이 들어라 전사의 旗ㅅ발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