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순문학의 길’ 홀로 걷다
전통찻집으로도 운영되는 서울 성북구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 <정지윤 기자>
“게쇼.”
굵은 목소리였다.
“예.”
“이거 땜질 좀 해주슈.”
“예에, 해드리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서 건강한 체구였다. 젊었을 때는 꽤 미남일 성싶은 얼굴이었다. 척 보기에 범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한말을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나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이시죠?”
“…”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디서 본 얼굴 같기도 했다. 땜질하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한참 동안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물어나 보자 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글 쓰시는 분 아니십니까?”
“…”
해방되면서 ‘현대일보’ 주간 맡아
<조국>에 나오는 대문이다. ‘남파공작원’ 김진계 선생이 불러주는 것을 보고문학가 김응교가 간추린 것으로, 8·15부터 70년대 첫무렵까지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채기들이 서리서리 담겨 있는 값진 적바림이다. ‘조국통일사업’을 위하여 땜쟁이 기술을 익히고자 원산에서 평양 쪽으로 가다가 마천령산맥 기슭에 있는 장동탄 광지구에 열흘간 머물 적이었다. 1969년 1월. 김진계 선생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내 말에 무슨 충격이나 받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흘리는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태준이라고 합니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나는 여기서 소설가 이태준을 처음 보았다.
평률리(평북 안주군)에서 민주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을 정리하면서 그가 쓴 창작집 <달밤>이나 장편소설 <가마귀>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문장강화>라는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글을 읽은 느낌은 우리말을 요리조리 자유롭게 쓰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해서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1954년 어느 날 그의 책 모두가 도서실에서 사라지게 됐다.
“아직 덜 됐나요?”
“예.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 헌데 아직도 글 쓰십니까?”
나는 이 사실이 궁금하였다.
“쓰고는 싶소만….”
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후에 알아본즉, 그는 숙청당하고 장동탄광에 가서 사회보장(여자 55세, 남자 66세가 넘으면 노동법에 의해서 먹고살 정도로 배급이 나왔다)으로 두 부부가 외로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15세 정도 아래로 깜끔하게 생겼다. 이태준의 말년의 모습을 본 나는 왠지 우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파 진영, 친일문인으로 낙인 찍어
해방이 되면서 문학동네 채잡이로 돋을새김된 상허는 몽양(夢陽)과 이정(而丁)이 이끌던 ‘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부장을 맡았고, <현대일보> 주간을 하였다. 43살 때인 1946년 2월 8~9일 이틀간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상허는 보고연설을 하였다. ‘국어재건과 문학가의 사명’이라는 제목이었다. 보고연설 한 어섯이다.
‘구인회’ 맴버였던 정지용·김기림의 시집.
“문학이 없이 언어는 있되 언어 없이 문학은 있을 수 없다. 조선문학이 없이 조선어는 있을 수 있되 조선어 없이 조선문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제국은 조선문화면에 있어 소극적이긴 하나 가장 조선적인 성격을 유지하는 문화행동이었던 조선문학을 금하기 전에 앞질러 조선어를 금한 것이요 일석이조 정책으로 조선작가로 하여금 일본어로 쓰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 음모를 의식했든 의식 못했든 간에 한두 작가씩 고독해 가는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에 붓끝을 모으던 경향은 우리 조선작가로서 모어에 대한 잔인성과 예술가적 자존심의 결핍을 폭로했던 것이다. 8·15 이전 일본과 조선의 경우에 있어 조선작가로 조선어를 버림은 조선문단을 버림이었고 조선작가로 조선문학을 버림은 그냥 붓을 꺾는 침묵이 아니라 일본어에로 전향함은 조선문화의 부정이요 따라 조선민족의 부정이었던 것이다.
관공청에서 조선어가 금지되었고 학교에서 교회에서 노상에서 조선어는 도처에서 구축당했다.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우리 민족의 최초요 최후의 문학인 조선어의 명맥을 끝까지 사수하기에 적당한 사람은 적든 많든 민중을 가졌고 기록을 남기는 우리 문학가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중대한 의무에 자각이 없이 모어의 곤경을 돌보지는 못할망정 일제 권력에 아첨해 조선어 말살에 채찍을 가한 문학가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오늘 조선어에와 조선어의 제작자인 우리 민족 앞에 경건히 참회하고 연후에 다시 조선어에 붓을 대일 것이다.”
<주간신태양>이라는 신문이 있다. 1947년 5월 3일 창간호를 낸 우익지로 김준연(金俊淵)이 사장이고 윤치영(尹致暎)이 주필이었다. 이 신문 47년 8월 16일치에 상허가 나온다. ‘친일파는 누구? 민족반역은 누가 했나’라는 제목으로 ‘문학가동맹편’이다.
…지금은 북조선으로 가서 소련을 다녀와 <소련기행문>까지 써서 소련 예찬자가 된 문학가동맹 위원장이던 이태준은 <대동아전기>를 출판하여 일본의 ‘미영격멸’ 사상을 고취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잠자코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듯 강한 해군을 가진 국민으로서의 기쁨과 펜과 카메라로 사는 우리가 이 역사적 해전을 이 시퍼런 눈으로 목격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렇게 그는 일본의 충량한 신민이 된 행복감에 도취되었었고 “우리는 당황해 덤비는 적들의 허턱대고 쏘는 포연을 비웃으며 유유히 그들의 해면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이튿날 적측의 방송에 의하면 제철소 외에 조선소에도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액은 오천 파운드에 불과하다 하였으며 이는 물론 시민을 속이는 것으로 위주인 그들의 상투적 허위보도가 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일군의 미군기지 포격에 대한 미군 측의 행동을 경멸하는 허위보도를 하여 미영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기도 하였으며… “모함으로 돌아가려면 갈 만한 상태였으나 원적(怨敵) 이십 년 이제 하와이 군항에 이르러 탄환만으로 성이 차지 않은 때문이리라”하여 육탄공격을 찬양했고 이러한 제국 잠수함의 활동에는 미국 본토가 진감되었고 영국이 인도와 호주의 교통에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과 물자의 창고인 인도를 잃어버리는 기운에까지 빠지어 허덕허덕하게 된 것이다. … 미국은 태평양에 부릴 배가 모자라 애쓰던 자이오 샌프란시스코는 서남태평양 방면에 있어 해상교통의 출발점이라 이 항구 일대가 우리 잠수함에게 위협을 받게 된 사실은 미국으로서는 무엇보다도 큰 고통일 것이었다. …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쓰는 진작부터… 솔직히 비명을 한 것이다.
이렇게 미영의 무력(無力)을 선동하여 왜적에게 충성을 하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그때 조선문단에서 친일 상채기가 없는 문학인은 이기영·한설야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이태준 또한 이광수 다음으로 받았던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과 <조광> 42년 1월호에 쓴 ‘행복의 흰 손들’이라는 짧은 줄글과 <신세대> 44년 6월호에 쓴 르포 ‘목포조선 현지기행’ 한 편이 있을 뿐이다. 임종국(林鍾國)이 찾아낸 친일성향 글이 단 2편이었는데, <신태양>에서 말하는 <대동아전기>라는 책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상허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친일작품을 쓴 것이 없다. 뒷날 북조선에서 쓸어없어졌을 때도 친일작품을 썼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위에 따다 쓴 만큼을 가지고 친일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신태평양> 기사는 타고난 친일업보로부터 벗어날 길 없는 이른바 민족주의 우파들이 물고들어가는 언짢은 물귀신작전이었다.
예술성 뛰어난 민족문학 작가
이태준의 문학 동지였던 정지용.
1946년 6월쯤 월북했고, 47년 방소문화사절단 한 사람으로 소련 나들이를 하였다. 을유문화사에서 단편선집 <복덕방>을, 북조선 문학가동맹·조소문화협회에서 <해방전후>와 <소련기행>을 펴내었다. 48년 최고인민회의 표창장을 받았고,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이 되었다. 49년 단편집 <첫전투>, 50년 중편 ‘고향길’을 끝내었다. 51년 ‘백배천배로’ ‘누가 굴복하는가 보자’ ‘미국대사관’ ‘네거리에 선 전신주’ ‘고귀한 사람들’ 끝냄. 52년 재일본조선인교육자동맹 문화부에서 소설집 <고향길>과 <신문장강화> 펴냄. 이즈음 남로당 숙청바람에 몰렸으나 소련파 기석복(奇石福) 뒷배로 살아났다. 55년 소련파가 사그라지면서 일제 때 ‘구인회’ 활동의 반동성과 사회주의사상성의 불철저를 이유로 끔찍한 꼬집힘을 받고 사라졌다. 그뒤 함남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했다는 증언이 있다. 김진계 증언에 따르면 66살인 1969년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또렷하나, 그 뒷소식은 알 길이 없다.
8·15 바로 뒤 ‘민족문학 수립’이 민족문학사의 맡은 일로 드러났을 때 그 한가운데 세워졌던 이태준이다. 단편소설 완성자였던 상허 이태준은 예술성이 뛰어났던 순문학 작가이며 민족문학 작가였다. 70년대에 서울에서 일어났던 참여문학과 맞서는 개념으로 ‘순수문학이 아닌 순문학’이며, 계급문학과 맞섰던 개념의 민족문학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한뉘 동안 고아의식에 시달렸던 상허 이태준이 홀로 일구어 홀로 걸어갔던 30년대 순문학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빼어난 단편인 ‘밤길’을 다시 본다. 문참(文讖)에 걸려버린 상허인 것만 같아 눈앞이 부우옇게 흐려온다.
허턱 주안(朱安) 쪽을 향해 걷는다. 얼마 안 걸어 시가지는 끝나고 길은 차츰 어두워진다. 길만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세차진다. 홱 비를 몰아붙이며 우산을 떠받는다. 황서방은 우산을 뒤집히지 않으려 바람을 따라 빙그르 돌아본다. 그러면 비는 아이 얼굴에 홈빡 쏟아진다. 그래도 아이는 별로 소리가 없다. 권서방더러 성냥을 그어 대라고 한다. 그어 대면 얼굴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나 빗물 흐르는, 비비틀린 목줄에서는 아직도 딸랑거리는 것이 보인다. 바람이 또 친다. 또 빙그르 돌아본다. 바람은 갑자기 반대편에서도 친다. 우산은 그예 뒤집히고 만다. 뒤집힌 지 우산은 두 번, 세 번 만에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또 성냥을 켜보려 한다. 그러나 성냥이 눅어 불이 일지 않는다. 하늘은 그저 먹장이다. 한참 숨을 죽이고 들여다보아야 희끄무레하게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