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 얽어 순수예술 파고들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상허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 <남호진 기자>
지난 7월 상순경 소개해 갔던 3·8이북 안협(安峽)에 정리할 것이 있다고 서울을 떠난 문학가동맹 부위원장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씨는 그동안 소식이 묘연하여 일반의 궁금의 대상이 되어 오던 중 지난달 막부(莫府)통신으로는 씨가 북조선 문화사절단으로 소련에 가 있는 것이 알려져서 그 귀환이 기대되던 바 요즘 동씨가 동사절단 일행과 함께 평양에 들어와서 체류 중이라는 기별이 왔다. 최초의 씨의 소식은 문학가동맹원에게 보내는 멧세지로서 씨의 소련관은 과거가 과거이니만큼 퍽 흥미를 끄는 것인데 동동맹이 공개한 서간은 다음과 같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8일치 기사이다. ‘악수할 날도 불원, 동지여! 영웅적으로 싸우라’는 제목 밑에 실려 있는 ‘평양서 이태준씨 멧세지’
여러분의 비분한 얼굴들이 눈에 선합니다. 어떤 난관이던 돌파하실 줄 압니다. 쏘베트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부러웠습니다. 그전 문학에서 보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받느니라, 아무리 외치어도 잃어버리기만 하는 인간성의 최고의 것이 유물론의 사회에서 소생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리까. 제도의 개혁이 없이는 백천 번 외친대야 미사여구에 불과하므로 예술이 인간에 보다 크게 기여하려면 인간을 바르게 못살게 하는 제도개혁부터 받아야 할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 분투는 어둡고 구석진 듯하나 세계의 민주정신의 태양이 여러분의 무대를 쏘아 비추고 있는 겁니다. 영웅적으로 일하십시오. 우리의 악수할 날도 그리 머지않을 겝니다. 평양에서 상허.
물무늬 같은 서정의 ‘단편소설 완성자’
상허는 1904년 강원도 철원(鐵原) ‘육부자네’로 떵떵거리던 용담(龍潭)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던 개화당 아버지를 잃은 것이 6살 때이고, 연해주 가까운 함경북도 배기미라는 갯마을에서 어머니를 여읜 것이 9살 때였다. 10살도 못 되는 나이에 나라와 함께 어버이를 잃은 상허는 옛살라비 곁붙이집에 맡겨져 봉명소학교를 나온다. 원산 따위를 2년간 떠돌며 객주집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이 18살 때였다. 윗반에 정지용(鄭芝溶), 김영랑(金永郞), 박종화(朴鍾和), 아랫반에 박노갑(朴魯甲)이 있었고 스승이 가람(嘉籃) 이병기(李秉岐)였다.
1924년 졸업을 1년 앞둔 4학년 1학기 때 동맹휴교를 목대잡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갔다. 신문과 우유배달 따위 밑바닥 일을 하며 나도향(羅稻香) 같은 문학청년들과 사귀며 문학을 갈닦았다. 단편 ‘오몽녀(五夢女)’를 <조선문단>에 보내어 뽑혔고, <시대일보>에 실림으로써 문학동네에 이름 석 자를 올렸으니, 22살 때였다. 1927년 상지(上智)대학 예과에 들어갔으나 배움비발과 살림비발을 댈 길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개벽>사 기자로 들어가 <학생> <신생> 같은 잡지 꾸미는 일을 거들며 동화, 단편소설, 희곡을 선보였다. 1930년 27살 때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나온 이순옥(李順玉)과 혼인하였고, 다음해 <중외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그 신문이 문을 닫으면서 이름을 바꾼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문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작가”
30살 때인 1933년 이종명(李鍾鳴)·김유영(金幽影)·이효석(李孝石)·이무영(李無影)·유치진(柳致鎭)·조용만(趙容萬)·김기림(金起林)·정지용과 ‘구인회(九人會)’를 얽어 순수예술을 파고 들었다. 비롯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인회’를 일으켰던 이종명, 김유영과 이효석이 물러나고 박태원(朴泰遠)·이상(李箱)·박팔양(朴八陽)이 들어왔으며, 그 뒤로 유치진, 조용만 대신 김유정(金裕貞)·김환태(金煥泰)가 들어와 숫자는 늘 9명이었다. 카프 계급문학에 반하는 이른바 순문학을 두남두었는데, 더구나 이태준은 아름다움을 파고드는 서정성 높은 문장에서 거의 독판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34년 단편집 <달밤>, 37년 <가마귀>를 펴내었고, 처녀작 ‘오몽녀’가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마지막 영화로 만들어졌다. 39년 <문장>지 편집자 겸 새사람 작품을 가려뽑는 일을 맡아 임옥인(林玉仁), 최태응(崔泰應), 곽하신(郭夏信)을 밀었다. 40년 <문장강화>, 41년 수필집 <무서록>, 일어판 단편집 <복덕방>을 펴내었다. 43년 단편집 <돌다리>를 펴내고 옛살라비 안협으로 내려가 해방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상허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가마귀’에 대한 카프 평론가 한효(韓曉) 꼲아매김이다. <비판> 1936년 10월호.
이 작품은 폐병으로 신음하는 젊은 여성의 사(死)에 대한 공포와 불안과 자포자기와 불신과 환멸 등의 제심리를 묘파함과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의 작가생활의 궁상과 고독을 극히 단편적으로 취급하면서 그 고독의 속에서의 제반 우울 또한 젊은 여성에게 대한 애정의 문제를 씨의 독특한 수법을 가지고 지극히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사건의 전개라든가 ‘가마귀’를 중심으로 한 두 개의 성격 창조라든가 하는 것은 그의 문장의 세련과 한 가지로 매우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나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형상의 개성과의 결부의 필수를 전혀 망각한 씨의 관조주의적 편향은 어느 때나 씨의 작품을 현실의 생동적 혈맥의 표현과 멀리 이탈시키는 동시 편협한 주관적 감정의 과정과 신경질적 감수성의 평면화의 속에 방황하게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그 시대의 생활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는 김동석(金東錫) 꼬집음이 있었으니, 이른바 ‘사회적 전형을 창조해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조동일(趙東一)은 더욱 매섭게 꼬집는다.
이태준
‘가마귀’는 친구의 퇴락한 별장에서 방 하나를 얻어 외롭게 지내는 작가가 폐병 요양을 하러 근처 마을에 와서 머무르고 있는 처녀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 처녀는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연민 때문에 애인이 되어주려고 했더니 약혼자가 있었다. 까마귀 소리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한 마리 잡아 예사 새와 다름이 없는 줄 알게 하려 했는데, 까마귀를 활로 쏘아 죽이는 날 그 처녀가 운명했다. 까마귀를 핏덩이로 만들자 그 처녀에 대한 기대도 끝나고 마는 좌절을 맛보았다. 서술자가 주인공인 그 작가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예외자가 되어 음산한 기분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주변의 일을 불길하게 해석하는 기이한 상상에 사로 잡혔다. 소설이 자아와 세계의 대결임을 부담스럽게 여겨, 자아가 대결에서 벗어나 세계를 실상은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자아화하는 상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서정시에 근접시켜 서정적 소설을 만들어야 문학의 순수성이 보장된다고 믿는 경향은 이태준이 특히 뚜렷하게 나타냈다.
‘농군’은 임화한테서 “비록 단편일망정 이 소설을 꿰뚫고 있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비극을 속에다 갖춘 서사시의 감정”이라는 높은 기림을 받았고, 40년 선보인 ‘밤길’은 ‘잔잔한 애수’로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한 풍김새를 보여준다. 카프 작가들이 민중을 그릴 때 무엇보다도 먼저 눈여겨보는 것이 ‘계급의식’이었는데, 배운 것 없고 가난한 민중에게 그지없는 사랑을 가지고 인간적 믿음을 보내는 것이 상허 소설의 다른 점이었다. 낡아서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대한 더없는 사랑을 기울여 쓴 작품들 가운데 물무늬처럼 잔물결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달밤‘이다. 상허 문학에서 다룬 것들은 계급모순이 아니라 민족모순이었다. 반제·반파쇼를 외치며 죽창 들고 뛰어나가는 ‘젊은피’들이 아니라 땡볕에 타서 새까맣게 구겨진 여느 조선 사람들 주름진 얼굴을 주장삼아 다루었다. 단편?중편소설 80여 편과 장편소설 14편을 썼지만 상허 문학 본바탕은 단편소설이었다. “우리 문인 중에서 누구보다도 ‘문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작가”라는 김기림 말처럼 오래 묵은 술향기처럼 아름다운 단편소설 완성자였다.
“언제 또 오시렵니까?”
“이런 서울 오고 싶지 않소이다. 시골 가서도 그 두문동 구석으로나 들어가겠소.”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층계를 내려가고 마는 것이었다. 현은 잠깐 멍청히 섰다가 바람도 쏘일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미국군의 찝이 물매미떼처럼 서물거리는 사이에 김직원의 흰 두루마기와 검은 갓은 그 영자 너무나 표표함이 있었다. 현은 문득 청조 말의 학자 왕국유의 생각이 났다. (…) 일제시대에 그처럼 구박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끝내 부지해온 상투 그대로, ‘대한’을 찾아 삼팔선을 모험해 한양성에 올라왔다가 오늘, 이 세계사의 대사조 속에 한 조각 티끌처럼 아득히 가라앉아 가는 김직원의 표표한 뒷모양을 바라볼 때, 현은 왕국유의 애틋한 최후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아직 차나 어딘지 부드러운 벌써 봄바람이다. 현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회관으로 내려왔다. 친구들은 ‘프로예맹’과의 합동도 끝나고 이번엔 ‘전국문학자대회’ 준비로 바쁘고들 있었다.
예술성 기반 좌우파 문학 아우르다
1946년 3월 23일 끝낸 단편 ‘해방전후’ 끝 어섯이다. 조선문학가동맹이 마련한 ‘해방기념조선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심사위원은 정지용·안회남·홍명희·김기림·김남천·이원조·이병기·조벽암·권환·양주동·임화·박치우였다.
8·15를 맞아 문학을 사북으로 한 문화동아리 채잡이가 된 상허였다. 조선문학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이 되었고, 역사적인 전국문학자대회에서는 김태준(金台俊)과 공동의장을 맡아 모임을 목대잡았으며, ‘문건’과 ‘예맹’이 합쳐진 ‘조선문학가동맹’에서도 목대잡이가 되었다. 위원장인 홍명희는 시늉만이었고 이태준과 함께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영·한설야는 해방되던 해 11월 월북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그것의 예술성으로 높은 꼲아매김을 받았던 상허였으므로 좌우파 문학을 아우르는 줏대가 될 수 있었다.
카프작가가 아니었던 상허 월북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평양에서 보내온 전갈과 함께 1947년 1월(9회)부터 서울 조선과학자동맹에서 펴내는 <주보민주주의>에 이어 실린 ‘소련기행’은 더구나 놀라운 것이었다. ‘소련기행’ 한 대문이다.
나는 바른 편에 앉은 농민대표의 호미처럼 흙을 풍기는 거친 손의 윤영감을 바라보고 이 여행이 비행의 감격이 다시금 새로웠다. 농민도 학자도 다같이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사회, 이 한 가지는 모든 조건에 있어 비약이요 그 약속이기 때문에 실로 아름답고 꿈인가 싶게 감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꿈꿀 힘이 없는 자는 살 힘이 없는 자다!” 나치 독일과 가장 맹렬히 싸운 작가 에른스트 롤러가 어느 작품 서두에 써놓은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런 꿈 같은 화려한 양식으로 찾아가는 쏘베트야말로 위대한 꿈이 실현되어 있는 나라가 아닌가!
<김성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