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전 ‘경향문학’ 거목 한설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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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전 ‘경향문학’ 거목 한설야 (하)

입력 2009.04.14 00:00

45년 11월 문화예술인 중 맨 처음 월북

북한의 농민들이 모여 토지개혁에 대해 좌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한설야는 농민·노동소설에 주력했다. | 김국후  인용

북한의 농민들이 모여 토지개혁에 대해 좌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한설야는 농민·노동소설에 주력했다. | 김국후 <평양의 소현군정> 인용

“1962년에 파문을 일으켰던 작가 한설야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일제시대에 ‘과도기’라는 작품을 써서 문단에 나온 작가인데, 나는 그의 작품을 평률리(평북 안주군) 리 민주선전 실장을 하면서 도서실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간도에서 이민을 갔다가 되돌아 온 주인공 가족의 눈을 통해서 한 어촌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쓰면서 식민지 사회의 허구성을 폭로한 이 소설과, 자본가의 생태를 노동자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노동장편소설 <황혼>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내가 있던 평양 초대소에서 한설야의 집이 가까워서 그에 대해서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남파 공작원 김진계 이야기를 보고 문학가 김응교가 쓴 <조국>에 나오는 대문이다. <조국>에는 한설야만 아니라 이기영·이태준 같은 작가며 김두봉 같은 독립투사, 그리고 정순덕 같은 지리산 항미빨치산들 이야기가 담겨 있어 여간 값진 적바림이 아니다. 김진계가 들었던 한설야 이야기이다.

이기영, 안막·최승희 내외와 함께
보통강가에 있는 그의 집은 양식으로 지어져서 대궐처럼 웅장했고, 입구에는 두세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항상 지키고 있었다. 사회안전부 소속의 지도원의 말에 따르면 한설야의 책은 유럽이나 소련에서 모두 번역되어 인세가 매일 국제은행의 구좌에 예금되는데,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한설야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도원이 한설야의 집에서 녹음했다는 테이프 얘기를 내게 해주었다.
녹음된 내용은, 처음엔 남쪽은 자신들을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산천이 있는 곳이라는 고향타령이었다. 그래서 친절하고 따뜻하고 간곡한 마음이 없겠냐, 뭐 그런 얘기였고, 그 다음엔 도쿄세라는 일본 노래를 한설야가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녹음된 내용의 뒷부분이었다. 뒤에는 현재 북조선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며, 무식하기 짝이 없는 김일성이 유일사상체계를 자신의 우상숭배로 이용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녹음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 물음에 지도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한 선생뿐 아니라, 최승희, 신불출 같은 반동패거리들의 목소리도 모두 녹음되었습니다.”
“예?”
나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민의 문화영웅들이었다. 특히 한설야는 국가에서 총리급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녹음기에 녹음된 내막은 이렇다고 들었다.

한설야의 집은 넓었고 놀기가 좋아서 항상 많은 문화일꾼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토론도 했다. 특히 남쪽에서 올라온 문화일꾼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곤 했는데, 모인 사람들은 한설야와 무용가 최승희, 최승희와 안막 사이에서 난 안성희(安聖姬),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등이었다. 그들은 매일 저녁마다 모여서 남쪽 고향을 그리워하고, 여느 간부들은 건강을 위해서 술안먹기운동을 하고 있는 데 반해, 그들은 양주를 먹으면서 금지된 일본 노래와 남쪽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한설야의 집 식모(상급 간부의 집에는 국가공무원인 가정부를 두었다)가 사회안전상 댁 식모와 함께 장을 보다가 “한 선생님이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드셔서 한잠도 못잔다”고 우연히 말한 게 발단이 되어 사회안전부 지도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지도원은 식모에게 이태리제 소형 녹음기를 주어서 그들의 말을 전부 녹음하도록 시켰다. 저녁에 식모는 술상을 차리는 척하면서 녹음기를 행주에 싸서 창틀에 올려놓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소형 녹음기에 모두 담겨져서 사회안전부에 넘겨졌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모두 숙청되었다.

인민 문화영웅으로 총리급 대우
한설야가 평양으로 간 것은 1945년 11월 끝무렵이다. 이기영, 안막·최승희 내외와 함께였으니, 문화예술인 가운데 맨 처음 월북이었다. 8·15를 맞아 서울에서는 문화예술 모임이 생겨났는데, 임화가 의장을 맡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이기영, 한설야가 세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었다. ‘문건’ 쪽에 선 문인으로는 김남천, 이태준, 안회남, 김기림, 박태원, 조벽암, 이용악, 이서향, 이원우, 민병균 같은 이였고, ‘예맹’ 쪽 문인은 박팔양, 한효, 송영, 엄흥섭, 이북명, 이동규, 이찬, 김북원, 박영호, 홍순철 같은 이들이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이 시키는 대로 두 동아리는 ‘조선문학가동맹’이 되는데, 머릿수에서 ‘문건’ 쪽이 앞섰다. 이름을 ‘문학가동맹’으로 할 것인가 ‘문학동맹’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거세찬 토론 끝에 부쳐진 표겨룸에서 43 대 28로 ‘문학가’를 내세운 ‘문건’ 쪽이 이겼던 것이다.

북으로 간 이기영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이 되고, 안막은 부위원장, 한설야는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문화부장이 되었다. 이때 한설야 나이 46살이었고 이기영은 50이었다. 한설야와 민촌 이기영 월북을 임화 동아리와 문단 목대 차지싸움에서 엎어짐으로써 설 자리가 없어진 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한쪽 눈길을 딱 잘라 대받는 글이 있다. 바로 민촌 손자인 이성렬이 쓴 <민촌 이기영 평전>에 나온다.

민촌 등의 월북은 이를 문단 내부의 틀 속에 한정해서 볼 것이 아니라 당시 정국의 큰 흐름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미군정은 조선인의 자치의 싹을 짓밟고 점령군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점차 노골화하면서 친일 관료 식민 경찰, 일제 군인 등 반민족적 인사를 재 고용함으로써 지하로 잠적했던 친일분자들이 하나둘씩 기어나와 다시금 세력을 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생사가 걸렸으므로 서로 똘똘 뭉쳐(나중에는 북에서 밀려 내려온 세력과도 연대하여) 민족세력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오히려 이들이 판을 주도하며 마구 테러를 자행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거꾸로 민족세력이 생사를 걱정해야 할 판이 된다. 당시에 이렇게 사태가 전개될 것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민촌 등이 김일성 노선(친일세력의 제거, 후일의 토지개혁 등)에 동조하여 월북한 측면에는 이런 재미없는 사태의 전개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문단 내의 파벌싸움에 패하여 월북했다고 한다면 다른 많은 비 카프계 문인들과 그 외의 수많은 양심적 인사들의 월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월북·납북 문인들 숙청에 앞장섰다”

한설야

한설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육문화상,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장, 세계평화이사회 이사,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냅다 몰아치던 한설야가 쓸려없어진 것은 1962년 10월이다. 김진계 증언에도 나오듯이 김일성을 꼬집는 말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복고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로 불도장이 찍힌 것이다.

북에서 펴낸 작품으로는 46년 ‘혈로’와 ‘모자’, 51년 ‘승냥이’, 56년 <설봉산>, 60년 <사랑> 같은 것이 있다. 특히 김일성이 일제와 싸웠던 것을 그린 장편소설 <역사>로 1951년 ‘인민상’을 받았는데, 48년 쓴 단편 ‘개선’은 대표적인 김일성 장군 자랑소설이었다. 공화국 정권이 세워지면서 북에서는 김일성 장군 자랑문학이 쏟아져 나왔는데-시에는 조기천(趙基天)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이찬(李燦) ‘김일성 장군의 노래’, 이정구(李貞求) ‘물결 속에서’, 박세영(朴世永) ‘애국가’ ‘햇볕에 살리라’, 이원우(李園友) ‘아침마다 부르는 합창시’가 있고, 소설로는 강훈(姜勳) 단편 ‘장군님을 맞는 날’이 대표적이다.

한설야 문학관을 보여주는 글이 있다. 1929년 <조선지광> 2월호에 나오는 ‘신춘 창작평’이다.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는 제목으로, 이른바 소설의 내용문제와 형식문제라는 고전적 명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이 작품평에 있어서 제일의적인 것을 우리는 누누이 말하여 왔다. 어떤 분은 전자를 가리켜 ‘내재적 비평’, 후자를 가리켜 ‘외재적 비평’이라는 신조어를 붙여가지고 갑론을박격으로 한참 싸우고 혹은 분리설 혹은 절충론까지 들더니 지금은 그도 다 자연도태되고 만 모양이다.

우리는 이 양자의 중요성을 잘 안다. 그러나 특히 전자를 역설하여 왔다. 왜? 우리는 후자에 있어서는 전통적 유산을 많이 가졌으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만한 수준을 보지하고 있지만 전자에 있어서는 현실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상천(尙淺)하여 이른바 그 ‘무엇’을 파악하기가 곤란하므로 또 사실에 있어 그것이 가장 중요함으로 이것을 더욱 고조하고 역설하여 왔던 것이다. 이하의 평도 이 의미에 불과하다. 일체 선험적 관념과 주관적 구성을 떠나서 사회적·객관적·구체적·계급적 시각에서-.

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이기영을 곁부축하였던 정률(鄭律, 본명 정상진, 1918~ )이 한 말을 이성렬이 적은 것이다.
“이태준, 한설야 등이 연회석에서 늘 여자들을 희롱하고 즐겨도 민촌은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고 하였다. … 한설야가 이태준, 김남천 등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한설야와의 대화에서 직접 들었는데 한이 민촌에 대하여는 어쩌지 못한 것은 민촌이 워낙 고정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섭고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 참과 거짓은 알 수 없지만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정률은 거기서 김일성 우상화와 월북, 납북 문인들의 무자비한 숙청이 모두 한설야와 그의 조역자인 홍순철, 안함광, 엄호석들의 소행임을 고발하고 있다. 한은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기 위하여 자기보다 우수한 작가들을 짓밟았다고 하였다. 이태준, 임화, 김남천, 이광수, 김동환 등의 문인과 최승희 등의 예술인들을 그가 충분히 구원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운명에 관하여 무관심한 채 이들에 대하여 문학예술인들의 모임에서 악담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김진계가 말한 뒷대목이다.

“한설야는 당시 20대의 젊은 여자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압류되고 협동농장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고, 신불출이나 최승희는 한 2년 노동을 하다가 복권되었다고 한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