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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대표의 망자존대와 교주고슬

입력 2009.02.03 00:00

‘판정승’에 자만, 대화 닫으면 ‘자충수’

<박민규 기자>

‘입법전쟁’의 승리에 들떠 있던 민주당이 최근 소속 의원의 골프 외유 파문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반짝 상승 기미를 보였던 지지도가 다시 주저앉은 게 그 증거다. 동료 의원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나갔다는 변명은 서민의 부아만 돋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했다. 민주당 홈페이지에 잇따라 올라오고 있는 누리꾼의 비난은 통렬하기 짝이 없다.
“폭력국회로 외국에 망신을 산 것도 모자라 이런 시국에 과연 라운딩할 생각이 나는가.”

민주당 의원 골프 외유 파문으로 곤혹
이번 파문을 바라보는 성난 민심의 현주소가 아닐 수 없다. 서민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회기 중에 태연히 골프 외유를 떠난 일부 선량의 행태는 망자존대(妄自尊大)의 후과로 볼 수밖에 없다. ‘망자존대’의 고사에 나오는 마원(馬援)의 역정은 이번 파문으로 가장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된 민주당의 정세균 대표와 여러모로 닮아 있다.

<후한서> 마원전에 따르면 광무제 유수(劉秀)가 후한제국을 세울 당시 농서(감숙성 남부)와 촉(蜀: 사천성) 땅에도 외효와 공손술(公孫述)이 각각 황제를 칭하며 자립해 있었다. 원래 마원은 제후로 있던 증조부 마통(馬通)이 일족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주살된 까닭에 관직에 나설 수 없는 폐문(廢門) 출신이었다. 정 대표 역시 전국 최고의 오지로 손꼽히는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후 가난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수십 리 넘는 길을 매일 걸어 통학하면서 나뭇짐을 져야 했던 한문(寒門) 출신이다.

마원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왕망이 신(新)나라를 건국하면서 연좌제를 해제한 데서 비롯됐다. 그는 2000석의 녹봉을 받게 된 형을 따라 농서로 가 외효의 신임을 얻어 장군이 되었다. 이는 정 대표가 지방학교를 세 군데나 옮겨다니며 공부한 끝에 고려대에 합격해 총학생회장을 지낸 뒤 직장생활을 하던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은(知恩)을 입고 정계에 성공적으로 입문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국내 굴지의 무역상사에 근무하던 그는 국제 세일즈맨으로 동분서주하면서 미국 페퍼다인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따는 높은 학구열을 보여준 바 있다. 이는 만학 끝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바 있는 김 전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정 대표가 고향에서 내리 네 번 당선한 후 마침내 제1야당의 대표 자리까지 오르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마원이 건국공신이 된 것도 광무제의 지은에 따른 것이었다. 당초 동쪽의 유수와 서쪽의 공손술 사이에 낀 외효는 마원을 시켜 양쪽의 형세를 살펴보게 했다. 원래 마원과 공손술은 장안 주변의 우부풍군(右扶風郡)에서 함께 생장한 소꿉동무였다. 당시 공손술은 시위들을 섬돌 아래 벌려 세운 후 전상에 높이 앉아 마원으로 하여금 황제에 대한 배견(拜見)의 예를 올리게 했다. 배견이 끝나자 그는 오랜만에 만난 죽마고우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마원에게 빈관(賓館)에 들도록 한 뒤 황제의 명의로 관직과 관복을 하사했다. 마원이 좌우에 말했다.

“지금 천하는 호강(豪强)한 자들이 서로 다투고 있어 누가 이길지 아직 알 수 없다. 공손술이 이처럼 큰 소리를 치며 강대함을 자처하니 재사들이 어찌 그와 함께 공업을 세울 수 있겠는가.”

이어 농서로 돌아와 외효에게 이같이 보고했다.
“공손술은 정저지와(井底之蛙 :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는 천하가 넓은 것을 모르고 ‘망자존대’하고 있습니다. 동방(東方: 유수를 지칭)에 뜻을 두느니만 못합니다.”

촉 땅의 주인이 된 것을 가지고 마치 천하를 얻은 양 거들먹거리는 공손술을 소인배에 비유한 것이다. 이후 마원이 광무제의 휘하로 들어가 천하통일의 대공을 세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마원이 쌀알로 산과 골짜기의 모형을 만든 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통일의 계책을 진언하자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한 광무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적이 나의 안중(眼中)에 있다.”

‘안중무인(眼中無人)’의 자세로 ‘망자존대’한 공손술과 대비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죽마고우조차 ‘안중’에 두지 않은 공손술과 적의 부하 장수까지 ‘안중’에 둔 광무제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깽판국회’의 공범인 민주당 의원들이 ‘판정승’ 운운하며 태연히 골프 외유를 떠난 것은 국민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망자존대’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리더십 높이며 ‘가시적 대권주자’로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1월 9일 농성을 벌이고 있는 민노당 의원을 찾아 농성을 먼저 푼 데 대해 사과하고 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1월 9일 농성을 벌이고 있는 민노당 의원을 찾아 농성을 먼저 푼 데 대해 사과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정 대표는 이번 사건의 보고를 받고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망자존대’한 일부 의원과 분명 다른 것은 확실하나 이것이 민원(民怨)의 표적에서 벗어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정 대표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당초 정 대표는 작년 7월에 당 대표로 선출된 후 강경파 의원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종 여야 공조를 통한 경제 회생을 역설해 왔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채 ‘대결’만 능사로 삼는 야당은 끝내 국민들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여권의 화답은 그의 기대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청와대 영수회담 후 여당이 상임위에서 한·미FTA 비준안을 날치기 처리한 게 그 증거다.

정 대표가 ‘MB악법 저지’를 기치로 내걸고 대여 투쟁의 진두지휘에 나선 것은 책장을 덮고 말에 오른 유장(儒將)의 모습과 닮아 있다. 결국 그는 ‘입법투쟁’에서 승리해 당내의 리더십 논란을 잠재운 것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잠재적 대권주자’에서 ‘가시적 대권주자’로 발돋움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의 수훈(殊勳)은 시종 냉온탕을 오가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 여권 수뇌부의 리더십 부재에 따른 반사이익의 성격이 짙다. ‘가시적 대권주자’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호평 역시 아전인수의 측면이 강하다. 이번 입법 사태에서 가장 돋보인 중진 의원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의원와 강기갑·김형오·홍준표·원혜영 의원에 뒤이어 최하위인 6위를 차지한 게 그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의원이 ‘망자존대’의 골프 외유를 감행함으로써 민심을 이반하게 만드는 악재가 터져나온 셈이다.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그로서는 보고를 받지 못해 만류하지 못했다는 식의 변명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번 파문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할 경우 여당에게 2월 임시국회 강행 처리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4월 보궐선거에까지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망자존대’의 행보를 보인 의원들을 일벌백계해 당내 기강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이어 ‘MB악법’을 결사 저지해야 하는 이유와 배경 등을 국민에게 소상히 알리는 총력 홍보전에 나서야 한다. 이미 양날의 칼로 작용한 초강수를 둔 상황에서 유사한 책략을 구사하기도 쉽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교주고슬(膠柱鼓瑟)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기> 염파인상여열전에 따르면, 전국시대 말기에 조나라 장수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은 병서를 두루 꿴 나머지 천하에 자신을 당할 자가 없을 것으로 자만했다. 부친이 이를 우려해 이같이 유언했다.

“병사(兵事)는 흉사다. 그래서 선인들은 함부로 싸우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너는 결코 장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얼마 후 조나라에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자 진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장평(長平: 산서성 고평현)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조나라 대장 염파(廉頗)가 오직 성을 굳게 지키며 응전하지 않자 진나라 승상 범수가 반간계를 구사했다. 진나라 첩자들이 조나라로 잠입해 이같이 소문을 냈다.

‘백봉 신사상’ 수상자다운 모습 보여야

2008년 12월 31일 국회정상화를 위한 대표회담에서 서로 고개를 돌린 채 자리에 앉는 박희대 한나라당 대표와 정세균 민주당 대표.

2008년 12월 31일 국회정상화를 위한 대표회담에서 서로 고개를 돌린 채 자리에 앉는 박희대 한나라당 대표와 정세균 민주당 대표. <김정근 기자>

“염파는 너무 늙어 겁이 많다. 진나라 군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조괄뿐이다. 속히 조괄을 내보내 진나라 군사를 물리쳐야 한다.”

조효성왕이 이 말을 곧이듣고 조괄을 대장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인상여(藺相如)가 황급히 찾아와 간했다.
“조괄의 명성은 한낱 병서를 읽고 얘기하는 ‘지상담병(紙上談兵)’에 불과합니다. 임기응변의 용병 이치를 모르는 그를 장수로 삼는 것은 교주고슬(膠柱鼓瑟)과 같습니다.”

그러나 조효성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장평대전에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몰사하고 말았다. 이는 전국시대 전투 중 최대 참사에 해당한다. ‘지상담병’은 이론에만 치우쳐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뜻하고, 거문고의 줄을 고정시켜 탄주한다는 뜻의 ‘교주고슬’은 융통성이 없는 자를 빗대는 말이다.

정 대표가 2월 임시국회에서도 기왕의 성과에 자만한 나머지 또다시 결사저지로 나설 경우 이는 ‘교주고슬’의 자충수를 범하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민주당에 비상시국을 감안해 끝까지 여당과 타협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2월 임시국회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인기 발언이나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점에 비춰 강행 처리의 가능성이 크게 점쳐지고 있다. 이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정 대표는 4선 의원으로서는 유일하게 국회 출석률이 100%에 달하는데다 가장 신사적인 의원에게 주는 ‘백봉 신사상’을 6차례나 수상한 바 있다. 완급을 조절하며 끝까지 협의 타결에 노력하는 ‘신사의원’의 정수를 보여줄 경우 설령 여당이 강행 처리한다 해도 궁극적인 승리는 정 대표의 몫이다. ‘가시적 대권주자’에서 ‘명실상부한 대권주자’로 비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여기에 있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indj@hanmail.net

신동준 | 21세기정경연구소장. <조선일보> <한겨레> 기자.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대·외국어대·국민대 강사. <자치통감-삼국지> <국어>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 등의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