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자처한 권신은 ‘낙마’할 수도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가 최고의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석 달 가까운 늑장 개원으로 눈총을 받은 바 있는 제18대 국회가 결국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첫 해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거대 여당인 한나라당 원내 사령탑인 홍준표 원내대표으로서는 리더십 부재의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야당도 ‘깽판국회’에 일조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되었으나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야당에서는 새해 원단(元旦)을 심기일전의 전기로 삼기 위해 ‘연내 처리’를 고집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심기를 읽고 홍 원내대표가 총대를 멘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한나라당 내에서는 강행처리 결정 며칠 전만 해도 역풍이 우려된다며 신중론이 우세했다. 그러던 것이 문득 초강경의 기조로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래시계 검사’ 정계 입문 후 탄탄대로
원래 홍 대표는 이 대통령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같은 영남 출신에 고려대 동문이고, 같은 시기에 정계에 입문했다가 공교롭게도 선거법 위반으로 공히 낙백(落魄)한 후 워싱턴에서 야인생활을 함께 했다. 두 사람이 정계 입문 이전 각각 ‘현대건설 CEO’와 ‘모래시계 검사’의 신화를 쓴 전력도 닮아 있다. 2001년의 보궐선거에서 당선해 재기에 성공한 홍 대표는 2004년의 17대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듬해에 자전적 에세이인 <나 돌아가고 싶다>를 펴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이런 말로 축사를 대신했다.
“홍 의원이 앞으로도 계속 이웃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 모든 일이 다 이뤄질 것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청주지검에 근무할 때까지만 해도 판표(判杓)였다. ‘판관의 표상’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모래시계 검사’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부합한다. ‘세인의 표상’이라는 뜻을 지닌 ‘준표(準杓)’로 개명한 그는 이내 정계에 뛰어든 이후에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그러나 원래 정계는 주어진 법을 토대로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는 법조계와 달리 국리민복을 기준으로 국정의 선후완급(先後緩急)을 다루는 세계다. 선악(善惡)의 문제가 아닌 당부(當否)의 문제를 논하는 까닭에 높은 수준의 식견과 경륜, 방략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2006년에 이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권에 도전할 생각으로 서울시장의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동문 후배에게 고배를 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법조계에서 중망(衆望)이 정계에서의 중망으로 연결되지 않는 결과다.
게다가 그는 이번 일로 인해 자칫 중원(衆怨)의 대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망’을 먹고사는 정치인이 ‘중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독배를 마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찍이 전국시대 초기에 위(魏)나라의 악양(樂羊)이 유사한 길을 걸은 바 있다. 그의 삶은 여러모로 홍 대표와 닮았다.
악양이 포의(布衣)로 있을 당시 길을 가다가 우연히 황금을 줍자 크게 기뻐하며 이를 아내에게 자랑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황금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지사(志士)는 남몰래 샘물도 마시지 않고, 염사(廉士)는 예를 갖춘 음식이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내력도 알 수 없는 이런 황금을 갖고 와 그대의 인품을 더럽히는 것입니까.”
악양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황금을 들에다 내다 버린 후 멀리 스승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그가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자 베틀에서 비단을 짜던 아내가 물었다.
“그대는 배움의 길을 성취했습니까.”
“아직 성취하지 못했소.”
아내가 즉석에서 칼을 뽑아 베틀의 실을 모두 끊어버렸다. 악양이 크게 놀라 까닭을 묻자 아내가 대답했다.
“대장부는 학문을 성취한 연후에야 가히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을 다 짠 연후에 옷을 만들어 입는 것과 같습니다. 중도에 돌아온 것이 칼로 끊어버린 이 비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악양은 다시 집을 떠나 7년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한 끝에 마침내 천하의 명사가 되었다. 부인의 ‘단기지훈(斷機之訓)’이 빚어낸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가까스로 마련한 단돈 1만4000원을 들고 검정고무신 차림으로 서울역에 내린 시골학생이 고대에 합격한 후 30세가 다 되는 나이에 고시에 합격한 것도 아내의 전폭적인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대 앞 은행에 근무하던 여인을 열애 끝에 아내로 맞아들인 그의 애처송(愛妻訟)이다.
“결혼 전에 다른 여자에게 한눈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혼 후 불가피하게 룸살롱 등을 가게 되어도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아내는 지금까지 나를 종교처럼 믿고 따른다.”
그가 ‘제2인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도 악양이 중산국(中山國) 함몰의 대공을 세우는 과정과 유사하다. 당초 위문후(魏文侯)가 군신들과 중산국 정벌 문제를 상의하자 재상인 척황(翟璜)이 악양을 천거했다. 그러자 좌우에서 반대했다.
“악양의 큰아들 악서(樂舒)가 지금 중산국에서 벼슬을 살고 있습니다. 그를 어찌 대장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척황이 말했다.
“악양은 공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비입니다. 그런 지조 있는 선비에게 대장의 직책을 맡기면 어찌 성공하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모래시계 검사’의 정계 입문 과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얼마 후 척황이 악양을 데리고 입궁하자 위문후가 물었다.
“그대의 아들이 중산국에서 벼슬을 살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소.”
악양이 대답했다.
“대장부는 오직 군주를 위해 힘쓸 뿐입니다. 어찌 사정(私情)으로 인해 공사(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출격했다. 악양이 중산국 군주 희굴(姬屈)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독촉하자 희굴은 악서를 성 위로 올려 보내 한 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케 했다. 이런 일이 세 번 계속되자 석 달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자 위나라 대신들이 다투어 그를 헐뜯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그 많은 상소문을 읽지도 않은 채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 악양이 마침내 총공격의 명을 내리자 중산국의 대부 공손 초(焦)가 희굴에게 제의했다.
위나라 악양의 출세가도와 비슷
“그가 아들의 요청을 세 번이나 들어주었으니 얼마나 자식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악서를 높은 장대에 매어 성벽 위에 세우십시오. 악서가 살려 달라고 애걸하면 그는 반드시 공격을 멈출 것입니다.”
희굴이 이를 좇았다. 악서가 살려달라고 소리치자 악양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중산국의 신하로 기이한 계책을 내지도 못하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응당 목숨을 걸고라도 군주에게 강화를 강권해야 하는데도 이를 하지 못했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이에 악서가 자진하고 말았다. 그러자 공손 초가 말했다.
“악서로 국을 끓여 보내십시오. 그는 반드시 슬픔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이 지나치면 넋을 잃고, 넋을 잃으면 전의도 상실하게 마련입니다. 이 틈을 타 적을 치면 가히 다음 계책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중산국 사자가 국을 갖고 오자 악양이 사자 앞에서 국을 다 먹어치웠다. 결국 중산국은 함몰되고 말았다. 악양은 소위 ‘대의멸친(大義滅親)’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2008년 12월 18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다. <서성일 기자>
홍 대표가 협상 마지막 날 당내 강경파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쟁점 법안의 ‘2월 협의처리 방안’을 제시한 것은 악양이 석 달 동안 공격을 유예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협상 타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가 마침내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라고 탄식을 내뱉으며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결단을 내린 것도 자식을 삶은 국을 먹는 악양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을 대신해 악역을 자처한 홍 대표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악양의 사례가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당시 위문후가 승첩을 받고 기뻐하자 곁에 있던 대부 도사찬(覩師贊)이 이같이 말했다.
“자식의 고기까지 먹을 정도라면 무엇인들 먹지 못하겠습니까.”
위문후는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악양이 개선한 후 위문후에게 중산국 지도와 전리품을 바치자 위문후도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악양이 자못 의기양양하자 잔치가 끝난 후 위문후가 좌우에 명했다.
“두 개의 상자를 이리 내오너라.”
악양이 집에 돌아와 상자를 열어보니 그 속에 자신을 비난하는 상소문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가 이튿날 입궁하여 위문후에게 사례하자 위문후가 말했다.
“장군은 이번에 너무 수고가 많았소. 앞으로는 아무 걱정 말고 편히 쉬도록 하시오.”
이에 그를 영수군(靈壽君)에 봉한 뒤 병권을 거둬들였다. 겉으로는 칭송하면서도 내심 악양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권신(權臣)으로 존재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군주를 대신해 악역을 자처한 권신들은 하나같이 군총(君寵)을 잃고, 이내 분사(憤死)하거나 섣불리 반기를 들었다가 패망하고 말았다. 아주 드물게 찬위(簒位)에 성공한 적도 있으나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이홍구 대표 전철 밟지 말아야
‘제2인자’로 불리는 홍 대표 역시 권신에 해당한다. 본인은 이번 일을 ‘대의멸친’에 입각한 충용(忠勇)의 행보로 해석할지 모르나 자칫 악양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1997년 당시 대선 경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는 노동 관련법 강행 처리를 진두지휘하면서 청와대의 낙점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이내 낙마하고 말았다. 홍 대표는 대선 경선 당시 이같이 말했다.
“큰 정치를 하려면 경륜과 조국애 등을 갖춰야 한다. 3김 이후 너도나도 나서는데 우선 자신에 대한 절차탁마가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보기엔 ‘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모래시계 검사’ 출신의 자부심이 진하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대통령을 ‘깜’이 아니라고 생각해 대선 경선에서 뛰어든 것일까. 그가 후일을 도모코자 한다면 장차 논공행사 차원에서 이뤄질 입각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중망’을 잃은 권신이 ‘권총’까지 잃고도 성공한 사례는 전무했다.
| 신동준 | 21세기정경연구소장. <조선일보> <한겨레> 기자.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대·외국어대·국민대 강사. <자치통감-삼국지> <국어>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 등의 저·역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