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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와 ‘친정론’ ‘탕평론’ ‘시모론’

입력 2009.01.06 00:00

그가 할 일은 ‘직언과 인재 천거’

미국으로 떠나는 이재오 전 의원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미국으로 떠나는 이재오 전 의원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김문석 기자>

2009년 벽두부터 이명박 정권 창출의 ‘1등 공신’인 이재오 전 의원의 조기 귀국설이 가시화하면서 정가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당초 그는 지난 총선에서 ‘대운하 전도사’를 자처했다가 반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이내 낙선한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수 명목으로 외유에 나섰다.

원래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는 9선의 최다선 기록을 갖고 있는 김종필 전 총리가 효시다. 이 전 의원이 한나라당을 ‘이명박당’으로 변환시키고자 한 소위 ‘공천학살’ 파동의 책임을 지고 쓸쓸히 유학길에 오른 것은, 공화당 창당 주역인 김 전 총리가 창당 자금과 관련한 증권 파동 끝에 부득불 외유에 나선 것에 비유할 만하다. 이 전 의원은 출국 직전에 한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지금까지는 대한민국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봤는데 이제 세계의 눈으로 대한민국을 보고 오겠다.”

대운하와 공천학살의 ‘속죄양’
그가 이 약속을 얼마나 지켰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최근 그는 측근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그간 써둔 일기와 글 등을 토대로 미국 생활에서 느낀 소회와 정치 비전 등을 담은 가칭 <신(新) 서유견문록>의 출간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구한말에 나온 개화사상서의 압권인 유길준의 <서유견문록>을 모방한 그의 저서가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탁월한 방략과 비전을 제시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원래 그는 민중당 소속의 재야 출신이다.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도 내지 못해 이내 사라졌다. 이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를 신한국당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15대 총선에서 서울지역 최다 득표율로 당선한 후 내리 세 번 당선했다. 그가 이 대통령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6대 총선 이후다. 그는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 때 선대본부장을 지냈다. 이런 인연을 기반으로 대선 경선의 전초전 성격을 띠고 치른 당 대표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좌장 자격으로 출마한 그는 박근혜 전 대표의 지원을 받은 강재섭 전 의원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결국 그는 국민투표에서 이기고도 당원투표에서 져 석패하고 말았다. 한나라당 내 ‘친이(親李) 대 친박(親朴)’의 대립 구도는 여기서 비롯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11월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이재오 전 의원을 한나라당 당사에서 만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11월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이재오 전 의원을 한나라당 당사에서 만나고 있다. <박민규 기자>

이후 본선에서 유사한 상황이 빚어졌으나 그는 국민투표에 대한 ‘절묘한’ 셈법을 관철시켜 오히려 승부를 뒤집는 일대 전과를 올렸다. 당시 그와 이 후보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사한 상황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무언의 교감을 나눴을 공산이 크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공천학살’ 파동이 빚어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총선 패배 후 그가 총총히 미국 유학길에 나선 것은 ‘대운하’와 ‘공천학살’의 책임을 이 대통령에게 추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속죄양이 된 측면이 강하다. 그에게 커다란 부채를 안고 있는 이 대통령으로서는 그의 귀국 동정을 모른 체할 경우 신의가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복귀는 조만간 이뤄질 청와대 개편과 개각 등 당·정·청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와 맞물려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현재 친이계 의원들 내에서는 남은 임기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인물들이 당·정·청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친정론(親政論)’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친박계 의원들은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며 그의 복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와 관련해 ‘친정론’에 입각한 그의 측근들은 그가 속히 귀국해 흐트러진 당·정·청의 기강을 바로잡고, 싫은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소위 ‘시모론(媤母論)’을 펼치고 있다. 대통령을 대신해 궂은일을 도맡는 인물이 없는 까닭에 대통령이 모든 일을 직접 챙기고, 그 결과 윤지(綸旨: 통치 메시지)가 왜소해지면서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등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그 역시 최근 뉴욕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정계 복귀에 상당수 의원 부정적
“대한민국이 주목받는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좀 추스러야 할 시점이다. 정치인은 강력한 결단과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상황이 녹록지 않은 데 있다. 친박계 의원은 물론 상당수 친이계 인사마저 ‘시모론’의 배경에 의구심을 보내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친정론’과 ‘탕평론’, ‘시모론’이 내세우는 표면상의 논리에 지나치게 얽매인 결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들은 같은 곡을 다르게 연주하는 동공이곡(同工異曲)에 지나지 않는다.

‘시모론’을 전개하고 있는 이 전 의원 측은 전한제국 초기에 한문제를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주발(周勃)의 전례를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다. 당시 한문제는 주발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 10여 년간에 걸쳐 전횡한 외척세력인 여씨(呂氏) 일당을 토벌한 까닭에 그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토벌의 계책을 세운 진평(陳平)이 이를 눈치채고 우승상의 자리를 양보하자 한문제는 곧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한 뒤 진평을 그다음 자리인 좌승상에 임명했다. 당시 한문제는 주발을 정중히 예우해 그가 물러날 때마다 늘 친히 문밖까지 전송하곤 했다. 하루는 한문제가 주발에게 물었다.

“나라에서 1년 동안 처리하는 결옥(決獄: 옥사판결)이 어느 정도나 되오?”
“잘 모르겠습니다.”
“1년간의 전곡(錢穀: 재정) 출입은 어찌 되오?”
“잘 모르겠습니다.”
한문제가 좌승상 진평에게 묻자 진평이 이같이 대답했다.
“결옥을 묻고자 하면 정위(廷尉: 사법당담 총책)에게 묻고, 전곡을 묻고자 하면 치속내사(治粟內史: 재정담당 총책)에게 물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주관하는 일은 무엇이오?”
“무릇 재상은 밖으로는 사방의 제후들을 진무(鎭撫)하고, 안으로는 백성이 군주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관원들이 각기 맡은 직무를 성실히 이행토록 만들어야 합니다.”
주발이 크게 부끄러운 나머지 함께 물러나오다가 진평을 나무랐다.
“그대는 어찌하여 평소 나에게 그런 대답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오.”
진평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임무도 몰랐다는 것이오? 만일 폐하가 장안에 있는 도적의 수를 물었으면 그대는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대답할 생각이었소?”
이에 주발이 사퇴를 청하자 진평 홀로 승상의 자리에 남게 되었다. 당시 여씨의 토벌 과정에서 계책을 낸 진평과 이를 실천에 옮긴 주발 모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대공을 세운 셈이다.

박근혜 의원이 2007년 11월 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사과하는 이재오 전 의원을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근혜 의원이 2007년 11월 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사과하는 이재오 전 의원을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민규 기자>

이 대통령의 당선 과정을 되돌아볼 때 결정적인 순간에 이회창 후보를 주저앉힌 박 전 대표와 시종 선봉장 역할을 수행한 이 전 의원은 각각 진평과 주발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양측 모두 아직까지 제대로 된 논공행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 물갈이 인사를 그간 행하지 못한 양측에 대한 논공행상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탕평론’보다는 ‘친정론’에 무게를 두어 진평 대신 주발을 중용하는 방안을 선택할 공산이 크다. 일단 논공행상을 받게 되면 정치적인 채무관계가 청산되는 만큼 이 전 의원으로서는 신중한 행보가 필요하다. 주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현황 분석을 토대로 한 ‘충간(忠諫)’과 천하의 인재를 두루 찾아내 과감히 천거하는 ‘거인(擧人)’이 그것이다.

이 전 의원은 시종 충군(忠君)의 행보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공자의 제자인 자로와 닮아 있다. 자로만큼 스승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실천한 인물은 없다. 그러나 자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과감히 공자에게 충간해 만세의 사표(師表)에 누가 될 수 있는 실족 위기를 넘기게 한 바 있다. 일찍이 공산불요가 반기를 든 후 후한 예물을 보내 공자를 초빙하자 공자가 크게 흔들려 이에 응하려고 했다. 자로가 강력히 만류했다.

대운하 포기하도록 대통령 설득해야
“도가 행해지지 않아 갈 곳이 없으면 그만둘 일이지 어찌하여 하필이면 그에게 가려는 것입니까?”
공자는 결국 그의 충간을 받아들여 위기를 넘겼다. 이 전 의원도 초대 내각의 인선 당시 “공직자가 재산이 많으면 국민들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반대한 바 있다. 그가 복귀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충간은 이 대통령을 설득해 대운하를 공식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복귀가 성공적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여기에 있다. 버릴 것은 속히 버릴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결단이다.

두 번째로 그가 해야 할 일은 친박계 인사는 물론 야당과 재야의 인물을 망라해 천하의 인재를 두루 찾아내 천거하는 일이다. 현 정부의 실정은 ‘고소영’ 등으로 풍자된 협소한 인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친박계 인사들이 내세우는 탕평론도 ‘친정론’ 및 ‘시모론’과 취지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일찍이 조선조의 영조와 정조 모두 탕평을 내세운 바 있다. 학자들은 영조의 탕평론을 ‘완론탕평(緩論蕩平)’, 정조의 탕평을 ‘준론탕평(峻論蕩平)’으로 구분한다. 완론탕평은 취지는 좋았으나 외척과 연결되어 진행된 까닭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인재 내각으로 포장된 현 정부의 초대 내각이 이내 그 실체를 드러낸 끝에 촛불정국의 직격탄을 맞고 일거에 무너진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준론탕평 역시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과 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을 추구한 나머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본래 ‘탕평’의 기본 취지는 무편무당하게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해 최상의 통치를 이루는 데 있다. 이는 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이 당을 초월해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탕평은 신권 세력의 힘을 분산시켜 상호 견제토록 만드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왕권 강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친정론’과 ‘탕평론’, ‘시모론’이 동공이곡에 지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기치로 내걸고 왕권 강화를 추구했음에도 끝내 실패한 것은 천하의 인재를 두루 활용하지 못한 데 있다. 향후 그가 명실상부한 ‘친이계’의 좌장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는 바로 이런 이치를 깨닫고 ‘충간’과 ‘거인’을 제대로 행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