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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백의종군’

입력 2008.12.30 00:00

절망으로 단련, 희망으로 행동

2008년 5월 10일 청와대에서 만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인사하고 있다.

2008년 5월 10일 청와대에서 만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3년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여론의 뭇매를 맞아 만신창이가 됐다. 반전의 기회에 목말라하던 당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환호작약할 일이 생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골적인 선거 개입에 발끈한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대통령탄핵소추를 제안하고 나온 것이다. 곡절 끝에 대통령탄핵소추안은 가결됐다. 하지만 “사과는 필요하나 탄핵은 반대한다”는 국민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도덕적 청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격은 자충수였다. 지지도가 10%대로 추락한 한나라당은 존재감마저 찾지 못하고 해를 넘기고 있었다. 위기 속에서 ‘희망의 솟대’는 두드러진 법이다. 백척간두에 선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박근혜 의원이 나선 것이다. 그는 이듬해 3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당선했다. “저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당을 위해 바치겠습니다”라는 게 그의 취임 일성이었다. 이게 첫 번째 백의종군 선언이었다.

한국 정치사 40년 만에 경선 승복
한나라당은 그가 몰고 온 ‘박풍’ 덕분에 기적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의 거듭된 횡보(橫步)에 “참 나쁜 사람” 등의 단구(短句)로 대응함으로써 인기몰이에 성공해 그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맞붙은 그는 다시 한 번 백의종군을 선언해야만 했다. 대의원 투표에서 이기고도 여론조사에 진 그는 관계자가 복잡하게 보고하자 “졌다는 거죠”라는 ‘단구’로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이는 두 번째 백의종군 선언에 해당한다.

그의 경선 승복은 1970년 신민당 경선 이후 근 4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 김영삼 민주당 후보는 2차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분패했지만 깨끗이 승복한 뒤 곧바로 김대중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두 사람(김대중·김영삼)의 갈등을 더 깊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결정적 계기는 장충단공원 유세였다. 당초 두 사람은 함께 유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유세 일정이 바뀌었다. 지원유세를 핑계로 자신의 지명도만 높이려 한다는 참모들의 의구심을 김대중 후보가 수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2007년 말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시사잡지인 <시대정신>과 인터뷰에서 당시 심경을 이같이 술회했다.

“그가 문득 나에게 온양의 면소재지로 가 연설을 하라고 보내놓고는 자기만 장충단공원으로 가 유세를 하는 거예요. 참 분하더군요. 나는 영남대표고 그는 호남대표인데 말입니다.”

당시 박 의원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눈물로 지지를 호소했다. 당선한 뒤 이내 유신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경선 승복을 선언한 박 의원은 선친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부지런히 지원유세를 다니던 중 당시 이명박 후보와 관련한 비리 의혹 사건이 잇달아 터져나오자 이내 유세 일정을 접은 뒤 침묵에 들어갔다. 비리 의혹이 정리되지 않는 한 지원 유세의 명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를 전후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면서 대선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양측의 집요한 구애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는 비리 사건이 의혹 수준으로 끝나는 기미를 보이자 마침내 침묵을 깨고 “정도가 아니다”라는 말로 이 전 총재의 상승세에 쐐기를 박고 나섰다. ‘노무현 심판론’이 팽배한 상황에서 사실상 당시 이명박 후보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친박연대’ 18대 총선서 악전고투
그의 이런 행보는 이순신과 사뭇 닮았다. 공교롭게도 이순신 역시 두 번에 걸쳐 백의종군한 바 있다. 선조 20년(1587)에 두만강 일대를 다스리는 만호(萬戶)로 있을 당시 함경병사 이일의 무함에 걸려 파직된 게 첫 번째 사례다. 10년 뒤인 선조 20년(1597)의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들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한 게 두 번째 사례다. 그는 원균의 패사 이후 복직해 남아 있는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임했다가 유탄을 맞고 순국했다.

전국시대 말기의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도 이순신과 유사한 수난을 당했다. 당초 그는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 땅을 거의 모두 점령하는 대공을 세웠다. 이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무함이 잇따랐으나 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 연소왕(燕昭王)은 오히려 참소한 자들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악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태자가 연혜왕(燕惠王)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제나라 측이 첩자들을 들여보내 반간계를 구사했다.

“악의는 제나라 토벌을 구실로 내걸고 있으나 실제로는 적과 긴밀히 내통하며 제나라의 왕 노릇을 하려는 것이다. 그를 갈아치우면 제나라는 즉시 함몰되고 말 것이다.” 반간계에 말려든 연혜왕이 악의를 소환하자 연나라 군사는 이내 대패하고 말았다.

박 의원은 이 후보의 옹립에 성공한 까닭에 악의처럼 소환을 당하거나 이순신처럼 순국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내막을 보면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제18대 총선의 공천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던 의원들이 대거 탈락해 ‘친박연대’라는 변칙적인 클럽을 만들어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생환한 게 그 증거다. 이 대통령에게 누차 ‘공치(共治)’의 언질을 받은 바 있는 그로서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사실 이순신도 명량해전에서 살아남아 귀환했을 경우 이내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고사(枯死)했을 공산이 컸다. 조선조에서 사상 최초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라는 두 권의 실록이 만들어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두 실록에는 이순신에 대해 엇갈린 내용이 수록돼 있다. 박 의원이 대공을 세우고도 고사 위기를 겪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역사상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는 큰 공을 세워 군주를 두렵게 만드는 소위 진주지위(震主之威)를 떨친 데 따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대통령과 박 의원의 ‘공치’를 거듭 권하고 있는데도 성사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박연대’가 우여곡절 끝에 복당한 현재 박 의원의 ‘진주지위’는 더욱 높아진 까닭에 ‘공치’는 허언(虛言)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진주지위’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순신보다 20년 앞서 왜구와의 거듭된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둬 소위 ‘절강병법(浙江兵法)’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명제국의 척계광(戚繼光)을 들 수 있다. 그는 반대파의 무함으로 이내 지방으로 좌천된 뒤 실의 속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죽기 전에 펴낸 <기효신서(紀效新書)>가 왜란 때 이여송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왜란 이후 조선조가 속오병(束伍兵) 및 삼수병(三手兵) 등을 창설하는 지침으로 활용된 것은 유명한 일이다.

백의종군의 출사표로 ‘진주지위’의 대공을 세운 이유로 청와대의 견제 대상이 된 박 의원은 2007년에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는 저서를 펴냈다.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한 것은 ‘신뢰와 원칙’의 정치다. 그가 이런 주장을 펴게 된 데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적잖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뢰와 원칙’은 <논어>에서 언급하고 있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의 타도를 의미한다. 2006년의 지방선거 당시 괴한의 습격을 받고 병상에 눕게 된 상황에서 “대전은요”라고 물어 대전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림으로써 한나라당을 배신한 염홍철 전 시장을 응징한 것이 그 실례다.

배신과 궤계(詭計)가 난무하는 현실정치에 절망한 많은 사람이 ‘신뢰와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그의 행보에 매료되어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갈지자 행보에 실망한 나머지 아직 잔여 임기가 4년이나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따논 당상’이라는 조급증마저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신뢰와 원칙’ 보여준 행보에 기대
‘고소영’과 ‘강부자’의 풍자를 자초한 이명박 정부는 차기 대선의 구도를 ‘영남 대 비영남’과 ‘부유층 대 비부유층’의 구도로 몰아가는 자충수를 범하고 있다. 만일 지금의 경제 위기를 제대로 타개치 못할 경우 최다 득표 차 당선의 영예를 안겨준 국민의 기대감은 일순 실망을 넘어 거대한 분노로 돌변할 소지가 크다. 이는 한나라당을 토대로 차기를 꿈꾸는 박 의원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에 해당한다. 현 정부와 박 의원은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운명에 처해 있는 셈이다.

‘신뢰와 원칙’의 정치는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王道)’에 해당한다. 전국시대에 맹자는 왕도로 능히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열국의 군주 중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득국(得國)과 치국(治國)의 요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당 대표로 있던 시절 극소수 사람들로 구성된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난세의 방략은 혼탁한 현실을 바탕으로 이상을 지향하는 패도(覇道)에 있다. 시종 ‘왕도’만 역설하는 박 의원이 치국에 앞서 과연 득국에 성공할 수 있을지가 여전히 불투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경선에서 괴이한 여론조사 셈법을 수용했다가 사실상의 ‘보위’를 상납한 것이 그 증거다. 난세의 상황에서 볼 때 이는 송양지인(宋襄之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세에서는 ‘패도’를 추구한 이승만에게 패할지라도 사후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자 한 김구의 ‘왕도’를 좇겠다면 할 말이 없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