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의 세월’’영웅시대’ 맥 이어… MBC 270억 쏟아부은 대작
MBC 제공
"태초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살아서는 물론이요 죽은 후에도 ‘유훈’으로 자식들 앞날을 이끄시니, 오직 아버지만이 진리요 빛이다!”
MBC가 270억 원을 쏟아부은 대작 ‘에덴의 동쪽’(극본 나연숙, 연출 김진만·최병길)은 대한민국 ‘창세기’에 관한 드라마다. 대한민국이 ‘건국 60년’의 신생국가고,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를 역사에서 말소시킨 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삼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굳이 1961년 탄광촌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자명하다. 이승만과 윤보선의 ‘원죄’의 시대를 지나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새로운 ‘사회 기강’을 세우고 새마을 새나라를 향한 초석을 닦은 기념비적인 때다. 그 ‘이름’을 2008년까지 명실상부하게 빛내고 계신 ‘국부(國父)’의 데뷔 첫 해인 것이다.
아버지는 가도 ‘유훈’은 남으리
‘에덴의 동쪽’의 시원(始原)에는 군사쿠데타의 엄혹한 시절에 ‘감히’ 노동운동을 했던 아버지 이기철(이종원 분)이 있다. 당시로서는 출현 불가능한 ‘학출’이라는 SF적인 이력에, 결혼 따로 사랑 따로의 플라토닉한 자유연애까지 즐기는 시대의 선각자(?)다.
일찍이 민족의 암흑기에 홀로 뜨거운 자식 사랑을 표출하사, “하늘만큼 땅만큼,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한다”는 곰살궂은 제스처까지 발명해낸다. 입에 붙지도 몸에 붙지도 않는 이 문어체의 제스처는 다섯 살의 동철에게 ‘제대로’ 각인됐을 뿐 아니라 핏덩이 시절 아비를 잃은 둘째 동욱에까지 ‘유훈’으로 남는다. 그곳 사람들만큼이나 헐벗고 착취당한 검은 ‘태백산’을 가슴에 품으라던 밑도 끝도 없는 메아리만 남았을 뿐이다.
에덴의 동쪽. | MBC 제공
황지 광업소장 신태환(조민기 분)이 신(神)보다 더한 권세로 전체 탄광촌을 지배하고, 그 악마적인 권력자와 1 대 1로 대결할 정도의 막강한 지지를 받는 광업소 노조위원장 이기철은 ‘운동’은 않고 아들에게 ‘설교’만 한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사나이”라는 모호한 범애(汎愛)주의자 기철은 아들을 결국 원수 앞에 무릎 꿇는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키우고 만다. 과거 청산은커녕 덥석 화해와 용서부터 하고 보자는 역사 왜곡의 기틀은 그렇게 유훈이 된다.
착한 유전자 VS 악한 유전자
이 드라마에 리얼리티를 기대하는 건 ‘기획’ 의도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북 사태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달래기’ 차원에서 만들었던 탄광촌의 온수 샤워장이 1961년의 것으로 둔갑하는 것쯤은 애교다. 돈이 없어 차라리 애가 사산되기를 바라는 광부의 아낙 춘희(이미숙 분)가 버젓이 ‘산부인과’에서 재벌가의 따님인 광업소장 부인과 나란히 출산하는 ‘리얼리티’도, 당시 서울에서도 희귀했던 젊은 한국인 신부(神父)가 깡촌에서 사목하고 있는 모습도, ‘간호사 선생님’이 갓난아기를 바꿔치기할 수 있게끔 병실과 뚝 떨어진 ‘신생아실’ 또한 모두 1980년대 이후의 것이다.
그렇다. 이 드라마의 주요 디테일과 미장센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온 ‘백 투터 퓨처’의 소산이다. 배우들의 극중 나이가 20년 이상 젊어졌듯이 극중의 리얼리티도 20여 년 후의 것에서 따왔다. 주인공 동철(송승헌 분)의 전성시대가 1981년으로 설정된 것을 보면 드라마의 본격 무대도 지금으로부터 20년 이상을 훌쩍 거슬러 오른다. 촌스럽고 올드 패션이라고?
야망의 세월(왼쪽)과 보통 사람들. <경향신문>
목적은 따로 있다. 60대를 30, 40대로 ‘회춘’시켜주고, 나아가 대한민국 역사를 60년으로 축소시키는 데 그 소임이 있는 것이다. ‘에덴의 동쪽’은 월남전과 열사의 사막을 넘어온 ‘건국 60년’ 세대, 이명박 대통령과 지금의 사회지도층이 ‘한창’ 일하던 40대 시절의 향수에 복무하는 드라마다. 그들의 청춘을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게 곧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다.
아이가 ‘또’ 바뀌었다. ‘신분’이 다른 아이들은 바꿔치기 됐으나 ‘피’는 못 속인다. 악마적인 신태환의 아들은 가난한 광부의 아들 동욱으로 살아도 집요하고 성질 급하고 복수심에 가득 찬 본성대로 산다. 신태환의 귀공자로 자란 명훈은 아버지와 달리 마음이 여리고 섬세하다. 피는 운명이고 천성이다. 자라난 ‘환경’ 따위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고로 ‘환경이 어떻든 사회가 어떻든 복지가 어떻든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드라마는 그렇게 역설하려 한다. 지지리도 가난하게 자란 동욱의 승승장구와 명석함과 하늘만큼 높은 야심은 유전자 속에 타고 난 것이다. 바뀐 운명도 모르고 자신의 친 아버지를 향해 “우리 아버지를 죽인 배신자, 살인마!”라고 악 쓰던 동욱은 열 살 어린이가 아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던 신화 속의 영웅 이승복의 이미지를 방불케 했다. 모든 것이 ‘돌아오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남편도 없이 10년을 ‘보상금’도 안 받고 버티던 춘희가 신보다 더 무서운 광업소장 앞에서 목발로 그의 밥상을 뒤엎고 난동을 부리며 여왕 같은 위엄과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보상금 돈다발을 태우는 것으로 카리스마는 마무리된다. 남편의 일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던 무식한 욕쟁이 춘희가 갑자기 ‘민중을 이끄는 여신’이 된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극대화하려면 광부들이 운집한 마당에서 태울 일이지, 굳이 좁은 광업소 소파 옆에서 방화한다. 돈이 없어 피똥을 싸는 주제에 감히 함부로 돈을 태우는 이 어이없는 기개는 영화 ‘님은 먼 곳에’에 이어 요즘 자주 애용되는 장면이다. 그 돈을 태우는 엄마의 ‘원죄’로 인해 동욱은 휘발유로 제 친부의 별장에 불을 지르고, 형 동철은 동생의 죄를 뒤집어쓰고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시작한다. 모두 ‘돈’과 ‘장남 노릇’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가진 자의 착취보다는 없는 자의 복수심과 오기가 불행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연쇄적으로 불러오는 것이다.
‘에덴의 동쪽’ 이전에 두 편의 드라마가 있었다. 1989년 KBS가 방영한 나연숙 극본의 드라마 ‘야망의 세월’과 2004년 이환경이 쓴 MBC의 ‘영웅시대’다. 그 두 편의 인기 드라마는 한 명의 슈퍼 히어로를 낳았다. 가난한 고학생이 대기업 평사원으로 입사하는 스토리는 단박에 시청자들의 ‘공감’을 유도했다. 그의 ‘평이한’ 시작은 시청자들을 무장해제시켰다. 바로 우리 이웃의 이야기처럼 친근감마저 주었다. ‘전원일기’를 통해 가장 이상적 캐릭터로 나이를 먹어온 배우 유인촌이 그 ‘영웅’에 입체감을 부여했다. 완벽했다. 더 이상 완벽한 영웅은 없었다. 영웅은 승승장구 끝에 건설사 이사가 된 뒤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미인 아내까지 얻는다. 영웅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이 KBS ‘야망의 세월’에서 실현되었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의 놀라운 점은 현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이었다. ‘모델’이 있었다는 점에서, 영웅의 성공 스토리는 그야말로 ‘하이퍼 리얼리즘’으로까지 둔갑했다. 이명박은 드라마 ‘야망의 세월’을 통해 그렇게 신화가 되었다. 시청률 50%의 초인기 드라마는 ‘드라마’로 끝나지 않았다. 건설사 대표에서 정치가로 진로를 바꾼 이후에는 인생 역정이 더욱 ‘드라마틱’해졌다.
나연숙 - 작가의 길, 어용의 길
작가 나연숙의 1982년 모습. <경향신문>
‘야망의 세월’ 이후 정치가로 변신한 이명박은 과연 현실에서도 대역전극을 펼치며 국회의원이 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성공’과 ‘야망’을 위해 선거운동을 한 결과 곧 범법자가 되고 만다. 그의 허물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후에도 대중은 이명박에게 관대했다. 시청자에게 각인된 것은 현실의 이명박이 아니라 실패를 모르는 ‘야망’에 찬 영웅이었다. 언론 또한 그의 범법을 ‘영웅의 추락’ 식으로 미화했다. 그는 곧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가 서울시장에 재임했을 당시 저지른 무수한 과오는 때맞춰 나온 드라마 ‘영웅시대’가 커버해버렸다. MBC ‘영웅시대’는 남성미로 똘똘 뭉친 최고 스타 유동근을 ‘이명박’ 캐릭터인 박대철로 만들었다. 마침내 그 희대의 영웅은 2007년 말 자신의 생일 대통령에 당선한다. 유인촌은 이명박 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됐다. 유동근은 4회까지 방영한 ‘에덴의 동쪽‘에서 가장 ‘사나이’답고 가장 화려하게 성공한 카지노 대부 국회장으로 출연해 주인공 송승헌에게 ‘제2의 아버지’ 모델이 될 예정이다.
MBC 창사 47주년 특별기획으로 ‘대한민국 60주년’을 기념하는 50부작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산모’는 작가 나연숙이다. 첫 장면부터 임산부가 줄줄이 나오던 이유는 나이 50줄의 이미숙을 20대로 ‘분장’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1994년 ‘남자는 외로워’ 이후 사실상 은퇴하고 미국으로 이민간 나연숙 작가는 10여 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그는 TBC 일일극 ‘야, 곰례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후, KBS ‘달동네’ ‘보통사람들’ ‘약속의 땅’ ‘야망의 세월’ 등 히트작을 양산했다. ‘달동네’는 아역스타 똑순이 김민희와 고 추송웅 부녀의 찰떡궁합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그 속에 ‘달동네’의 현실이 담겨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달동네가 드라마 속에서 낭만으로 이상화되는 동안 현실의 ‘달동네’는 속속 개발 붐으로 초토화되고 있었다. KBS가 TBC를 통합하고 ‘어용방송’으로 거듭나던 즈음 ‘보통사람들’의 삶에는 오직 가족과 친지의 관계와 그 속에서의 행복뿐이라는 ‘소박함’으로 우리 사회의 외연에 눈 가리게 했다. 얼마나 ‘대박’이었으면, 차기 대통령 노태우의 ‘공약’으로까지 채택됐겠는가.
나연숙은 이명박 대세론이 한창이던 2007년 오랜만에 드라마 집필을 의뢰받았다. 다시는 못 쓸 줄 알았던 드라마를 ‘대작’을 넘어 ‘대박’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얼마나 ‘산고’가 심했는지 시청자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현 통치자와 ‘이념’ ‘믿음’을 같이 하는 이 작가는, ‘에덴의 동쪽’을 통해 우리가 모두 ‘하나의’ 아버지의 후예임을 널리 설파하려 한다.
그 에덴의 동쪽은 그러나 ‘약속의 땅’을 지나온 자들의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위패와 훈장만 즐비할 뿐, 아버지들의 탐욕에 짓눌린 아들들의 통곡과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 곳이다.
김원<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