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습관을 바꾸자
6·25전쟁 이후 남한서도 계절에 상관없이 즐겨 먹어
손님으로 부쩍대는 한 냉면 전문점.
식객(食客)은 맛의 협객이다. 맛의 진수를 찾는 사람이다. 그가 찾은 최고의 맛은 한마디로 어울림이다. 원료의 질과 음식의 맛, 고명의 색깔, 그릇 모양의 어울림만이 아니다. 음식을 먹는 장소와 계절 그리고 함께 먹는 사람이 어울릴 때 음식의 미향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결코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의 장면 하나. 드라마 ‘식객’의 주인공 성찬은 히말라야 트래킹에 나선 옥자(여행사 직원)와 진수(기자)를 위해 네팔 카트만두에서 음식을 준비한다. 고산 트래킹을 할 땐 건강한 사람이라도 체력을 보강하기 위한 음식이 필수다. 또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입맛이 떨어지기 쉽다. 이 때문에 입맛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식단을 준비한다. 이런 고민에 빠져 있던 ‘성찬’이 내놓은 음식은 바로 한국 별미음식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냉면이다.
감자·메밀 이용한 북부지방 전통음식
고산병과 추위, 식욕 부진, 누적된 피로 등 갖은 고생 끝에 냉면을 먹는 트래커와 거대한 안나푸르나 설벽은 야릇한 앙상블을 이룬다. 볼륨 있는 S자 몸매,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 동양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진수에게 성찬은 “나에게 시집오면 이런 것 자주 해줄게”라고 프러포즈를 한다. 이를 옥자가 엿보고 있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북한 옥류관.
감미로움과 긴장감 넘치는 젊은 남녀의 삼각관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혹한의 카트만두에서 먹는, 오금까지 저리도록 차가운 냉면 맛은 어떨까. 미식가들은 “겨울철에 먹는 냉면이 제 맛”이라고 입을 모은다. 음식칼럼리스트 김성호씨는 “남부지방에서는 여름에 칼국수를 즐겨먹은 반면 북부지방에서는 겨울에 냉면을 선호했다”면서 “예전에는 한겨울 땅에 묻어놓은 독에서 살얼음을 깨가며 동치미를 떠와 온돌방에서 이를 부딪치며 국수를 말아먹었다”고 말했다. 후끈한 온돌방 화로 옆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얼음 동동 뜬 냉면을 먹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음식은 기후와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마련이다. 냉면은 비옥하지 않은 농토를 갖고 있던 한반도 북부지방의 전통음식이다. 음식물이 귀한 겨울에 구황작물인 감자와 메밀 등을 이용해서 만들어 먹던 전통적인 한국 국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면보다 국수라는 표현을 쓴다. ‘바로 뽑아낸 면을 물에 담갔다가 손으로 건진다’ 혹은 ‘면을 국물에 담가 먹는다’는 의미가 ‘국수’라는 낱말에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 국수의 대명사는 칼국수, 막국수, 냉면이다. 그 중에서도 면식문화상품의 으뜸은 냉면이라고 할 수 있다.
냉면 하면 평양물냉면과 함흥비빔냉면이 연상된다. 가늘고 질긴 면발과 눈물이 날 정도로 맵고 진한 냉면 비빔장이 함흥냉면 맛의 진원이다. 가늘고 질긴 면발은 개마고원 지역의 특산물인 질 좋은 고구마·감자 전분의 특성 때문이다. 후후 불며 함께 먹는 뜨거운 육수, 질긴 면발과 머릿속에 땀이 나도록 매운 비빔 양념장에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갔던 함경도 사람의 강인한 기질을 읽을 수 있다. 특히 함흥냉면엔 날생선을 곁들인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동해안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과 해산물을 음식에 이용한 것이다. 회를 얹어 먹는 회냉면도 이런 지리적 특성에 연유한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면발 다양해져
매콤한 맛과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는 물냉면과 비빔냉면.
평양물냉면 하면 시원한 국물을 연상한다. 원래 평안도 지방에서 추운 겨울, 따뜻한 온돌 아래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던 데서 유래한 게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은 맵지 않고 담백한 맛이 자랑이다. 전분이 아니라 메밀로 면을 뽑아서 함흥냉면에 비해 면은 거칠고 굵다. 냉면 육수로는 꿩 삶은 국물을 으뜸으로 친다. 하지만 사골을 우린 물이나 동치미 국물로 꿩 육수를 대신하기도 했다. 평양냉면은 대동강, 평양기생과 함께 평양의 빼어난 세 가지 풍물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평소 맵거나 짠 음식을 싫어했던 고종도 동치미 국물에 만 냉면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우리 냉면의 역사는 정확지 않다. 고려 말 몽고에서 전래했다는 설이 있다. 문헌상으로 연중행사와 세시풍속을 담은 ‘동국세시기’에서 첫 기록을 볼 수 있다. ‘동국세기기’에는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 섞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관서지방의 냉면, 그 중에서도 평양냉면의 맛이 가히 일품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동국세시기’는 11월의 음식으로 냉면을 꼽았다. 조선 후기의 음식 전문 조리서인 ‘시의전서’에도 냉면의 조리법이 나온다. 지금은 주로 냉면을 여름철에 즐겨 찾는다. 원래는 1~5월이 제철로 그 무렵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한국 음식 문화가 급변한 것은 6·25전쟁 전후다. 수많은 피란민이 자기 고장의 음식을 만들면서 음식문화가 전파되거나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냉면이다. 6·25전쟁 이전에는 남한에 냉면집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남쪽으로 넘어온 피난민들이 따뜻한 남부지방의 고구마 수확기와 맞춰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이게 냉면을 즐기는 시기가 변하게 하는 단초가 됐다고 한다. 본격적인 음식 상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계절에 관계없이 가장 즐겨 찾게 됐다.
물론 냉면이 남쪽으로 전파되면서 냉면 면발도 다양해졌다. 각종 육수를 국물로 만드는데, 꿩 대신 쇠고기나 닭고기를 이용하게 됐다. 함흥·평양냉면 외에도 이남으로 피난온 평양 사람들이 만들어 팔던 풍기냉면, 고기 장국을 끊인 육수를 차게 해서 말았던 장국냉면 등도 유명하다. 특히 부산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냉면이 더 이름을 얻고 있다. 피난민들은 냉면 맛을 잊지 못해 메밀이나 전분 대신 밀가루로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이게 부산 밀면의 유래다. 진주냉면도 남부지방에서는 꽤 알려져 있다. 순메밀 가루로 만든 국수를 쓰며 돼지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냉면은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음식 중 하나다. 몇 년 전 발표된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으로 겨울에는 불고기가, 여름에는 냉면이 으뜸으로 꼽혔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