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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밀가루가 우리 밀을 뽑아내다

입력 2008.07.29 00:00

생협연대가 운영하는 자연드림 베이커리는 우리 밀과 유기농 우유로 만든 빵·과자를 만들고 있다.

생협연대가 운영하는 자연드림 베이커리는 우리 밀과 유기농 우유로 만든 빵·과자를 만들고 있다.

임권택 감독이 지난해 100번째 작품 ‘천년학’을 발표했다. ‘서편제’에 이어지는 이야기 격인 이 영화에서 제주도를 찾은 동호에게 눈먼 누이 송화는 라면을 끓여준다.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는 동생에게 소박하나마 따스한 밥 한 사발이 아니라 라면이라니. 하지만 그 라면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인연이 그처럼 애틋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원래 토속적이고 투박한 음식을 좋아했는데 ‘천년학’을 찍으면서 라면에 조금씩 입을 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흔히 라면을 인스턴트 음식의 대명사로 여겨 몸에 안 좋은 음식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지나치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연간 34억 개, 한 사람이 70~80개나 소비할 정도로 대중적인 음식이어서 빵과 더불어 우리가 밀을 섭취하는 가장 큰 수단이 됐다. 해마다 크게 줄어드는 1인당 쌀 소비량과 달리 밀 소비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연간 약 35㎏으로 쌀의 절반 정도다. 나라 전체로 따지면 밀가루로는 150만t, 밀로는 200만t에 달한다. 이런 어마어마한 양을 우리는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 생산은 채 1%도 안 된다. 이런 탓에 아예 밀은 우리 농산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밀 소비 증가를 ‘식생활의 서구화’라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 식탁에 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밀이 들으면 아주 섭섭해할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밀밥을 해먹는 이가 드물지 않았으며, 잡곡밥에 밀을 한 숟갈 정도 넣는 혼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느낌이 일품이다. 한국식생활문화학회가 14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고문헌 50권을 조사해 내놓은 ‘조선시대 밥류의 종류와 조리 방법에 대한 문헌적 고찰’에도 밀밥이 버젓이 윗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리 대신 밀로 엿기름을 만들기도 했다. 껍질을 까지 않은 통밀을 하루 정도 물에 불렸다가 두면 뿌리가 나온다. 싹이 조금 자랄 때까지 물을 뿌려주며 기르다 햇빛에 잘 말려 빻으면 엿기름이 나온다. 매우 달기 때문에 식혜나 엿을 만드는 데 썼다. 밀짚으론 모자를 만들어 썼다. 찬 성질이 있어 더운 여름 들일을 할 때 제격이라고 한다.

자급률 1% 미만… 국제값 폭등 속수무책

생명연대에 설치되어 있는 우리 밀 제품판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생명연대에 설치되어 있는 우리 밀 제품판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 ‘나그네’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가 수록된 ‘청록집’이 세상에 나온 1946년 당시만 해도 밀밭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지금처럼 밀 생산 기반이 철저히 파괴된 것은 잘 알다시피 ‘PL480’에 의해 미국에서 잉여 생산된 밀이 물밀듯 쏟아졌기 때문이다. 정식 이름이 ‘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Agricultural Trade Development and Assistance Act)’이라는 것에서 드러나듯 이 법은 단기적으로 식량 부족 국가를 원조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나라의 생산 기반을 무너뜨려 미국의 농산물(밀) 수출 증대를 꾀하는 것이다. 1956년에 시작한 원조는 1981년까지 이어지며 우리 주위에서 밀을 사라지게 했다. 생산비도 못 건지는 밀농사를 감당할 농민은 없었다.

사실 지금의 밀 소비 증가도 식생활의 서구화라고 보기 어렵다. 라면과 국수, 슈퍼마켓에서 파는 빵과 과자. 이는 지극히 한국적인 식문화라 할 수 있다. 지난해부터 국제 밀값이 폭등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수입관세를 없애고, 정부가 직접 밀가루를 수입하는 방안까지 추진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일정 규모(30%) 이상 자급할 수 있도록 생산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