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1만7000원
두 발로 지면을 밟으며 걸을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한다. 이 경우 아스팔트나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면 훨씬 좋다. 한적한 시골길이나 경치 좋고 공기 맑은 산길이라면 더더욱 좋다. 고대 그리스의 소요학파가 걸으면서 철학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제외하고도 걷기는 여러모로 인간에게 유익하다. 최근에 부쩍 강조하는 건강, 느림의 미학에도 걷기는 빠지지 않는다. 자연을 느끼거나 고향을 생각하는 데도 걷기가 제격이다.
걷기가 오늘날 유독 주목받는 까닭은 그만큼 사회가 너무 빨리 현대화되었고 사람들 간의 정이 메말랐다는 증거다. 오늘날에는 마땅히 걸을 수 있는 곳이 없다. 사람들의 정이 묻어 있고 작은 길 하나에도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거의 모든 길이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그나마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길마저 흙먼지 날리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포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실정이다. 이는 모두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걷는 것을 기피하고 자동차를 선호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좁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에는 아직 수많은 ‘길’이 남아 있다. 문화사학자 신정일은 우리에게도 매우 귀중한 길이 있음을 직접 보여준다. 그 길은 뜻밖에도 오솔길이나 등산길이 아니라 ‘대로’다. 강남대로나 시흥대로처럼 자동차를 위한 대로가 아니다. 영남대로는 우리나라 국토의 근간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열나흘 동안 걸으며 그곳에 깃든 사연, 그 길과 벗삼고 있는 문화재 등을 소개하는 영남대로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우리나라의 옛길이다. 우리나라에 현재 경부고속도로가 있다면 옛날에는 영남대로가 있었던 셈이다.
영남대로는 960여 리에 달하고 낙동강 유역에서 한양까지 걷는 데 보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경상도의 58개 군현, 충청도와 경기도에 각각 5개 군현이 걸쳐 있고 29개의 주요 지선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의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하던 길이면서 반대로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직행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조선의 교통망의 근간이 되었다. 영남지역 선비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데 영남대로를 선택했다.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안고 있는 영남대로를 저자는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했던 것처럼 열나흘 동안 직접 걸었다. 영남대로를 걸으며 마주친 이야기, 유물·유적, 그곳 사람들의 애틋한 정을 이 책에서 송두리째 털어놓는다.
우리의 옛길에는 여전히 후한 인심과 따뜻한 정이 가득하다. 먼 길을 떠나는 객을 걱정해 한 상 가득 밥을 내놓는 아주머니, 저자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파이팅’을 외쳐 기운을 돋우는 아이들, 밥값으로 고작 2000원만 받으면서도 그마저 불우이웃을 돕는 데 거의 다 쓰는 식당 할머니… 자동차를 타고 휙휙 지나친다면 이 시대에, 우리 곁에 이처럼 정이 넘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유물과 유적뿐 아니라 우리의 옛길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길문화축제’ ‘우리땅걷기모임’에서 활동하며 우리 옛길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노력해왔다. 이 책을 읽어보면 저자의 주장이 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남아 있는 길을 보전하는 일은 물론, 사라진 옛길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다. 외국에도 이런 사례가 있으니 저자가 유별난 것은 아니다.
길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지금처럼 길을 자동차와 편리함에만 어울리게 개조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우리 전통의 숨결이 끊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