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크리시스 지음·김남시 옮김·이후·1만5000원
각 당의 대선 후보마다 한결같이 ‘일자리 창출’을 공약으로 내세운다. ‘일자리 창출’ ‘고용 안정’ ‘노동 환경 개선’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대선 후보뿐 아니라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들 역시 이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는 실정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일자리’와 ‘노동’을 구하지 못해 신음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사회는 갈수록 발전하고 부유해지고 있다. 그런데 일자리를 달라고 외치는 사람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노동환경이 과거보다 훌륭한 것도 아니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가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거나 곳곳에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산재해 있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무수히 양산된 비정규직은 늘 자신의 불안한 위치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규직 역시 편안하지 않다.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이 언제 어떻게 덮칠지 몰라 해고와 실직에 늘 조마조마해야 한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몰렸을까. 노동은 원래 ‘즐거운 권리’여야 한다. 인간은 노동에서 기쁨을 얻어야 하고 노동을 통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노동은 삶의 의미와 연결돼야 한다. 노동이 없으면 존재 이유가 희박해야 한다.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강조했던 것도 이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노동이 즐거움을 준 적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있었다면 대체 언제였을지도 궁금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동자들의 현실은 항상 열악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까닭은 노동이 즐거움이 아니라 ‘임금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생존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먹고살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노동이 욕구를 총족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데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노동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소외된 임금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친 것이다.
노동이 자본에 구속된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출렁대는 오늘날 더욱 심화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고 주먹을 불끈 쥐며 노동이 자본과 맞섰던 시대는 차라리 행복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가에게 노동자들이 단결해 큰소리 떵떵 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눈물겹게 감격스러웠다. 낙오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은 채 개인의 능력 문제로 치부하는 오늘날, 책상을 붙이고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동료가 아닌 경쟁자로 인식하는 오늘날,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말은 노동에서 낙오한 사람들을 방치하는 현상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사회 비판 활동을 벌이고 있는 좌파그룹 ‘크리시스’가 펴낸 ‘노동을 거부하라!’라는 책은 오늘날의 노동과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또 한 번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구한다. 이들이 촉구하는 단결은 노동자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손잡아 자본에 저항하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함몰되고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에 결박당한 노동을 거부하라는 의미에서의 단결이다. 크리시스가 “노동을 거부하라”며 노동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강조하는 까닭은 노동을 삶과 통합하기 위해서다.
크리시스는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시키는 자본에 종속돼버린 노동을 거부해야 인간이 자유로워질 것이며 본질에도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리시스의 활동은 종종 ‘외부에서만 들여다본 급진적 태도에 불과하다’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정치·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등의 비판을 받는다. 이 책에서도 이 같은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들의 지적은 하나같이 날카로우며 이 사회의 현실을 똑바로 보는 데 큰 보탬이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삶을 되돌아보고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