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이후 서유럽에서 ‘파시즘’ 또는 ‘파시스트’란 말은 금기어가 됐다. 비단 서구만의 사정은 아니다. 군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배와 장기간의 군사독재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도, ‘파시스트’라는 말은 이념적 좌우를 가리지 않고 최고 등급의 경멸어다. 자신을 우파라고 칭하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감히 파시스트를 자임하는 사람은 없다.
파시즘의 개념과 역사를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영국 카디프 대학 역사학과 교수 케빈 패스모어는 파시즘이 그 내부에 다양한 측면을 품고 있는 복합적인 이념이라는 점을 전제하면서, 파시즘은 무엇보다도 “초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민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므로, 각기 계급문제와 여성문제에 천착하는 사회주의와 여성주의에 적대적이다.
파시즘의 동력이 민족주의적 열정이라 할 때, 그 열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종주의와 남성우월주의를 통해서다. 특정 민족의 피의 순결성과 우월성에 대한 집착은 히틀러의 유대인 절멸 정책에서 그 비극적 정점을 이뤘고, 남성우월주의는 전쟁과 스포츠에 대한 숭배 및 여성을 출산 기계로 비하하는 태도로 드러났다.
서구 역사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파시스트 정부와 그 정부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나라마다 다른 양상을 보였다. “독일에서는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교사들이 나치를 선호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 집단이 좌파에 이끌렸다. 헝가리로 가보면, 강력한 노동계급과 토지 없는 노동자들이 파시즘을 지지했다. 파시즘은 어떤 사회계급에 특별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이 허약한 정당 체제와 맞물리며 박정희식 개발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에 대한 학문적 고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역자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이론적 활동이 부질없어 보인다 해도 우리는 이를 포기할 수 없다.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이 곧 파시스트적 열정에 몸을 맡기는 시점(始點)이다.”
|캐빈 패스모어 지음·강유원 옮김·뿌리와이파리·1만5000원|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