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9일 400여 명의 버마 국민이 옛 수도 양곤에서 집회를 열었다. 대부분 가정주부인 이들은 버마 정부가 일방적으로 연료 값을 인상한 데 반대해 시위에 나선 것이다. 8월 15일, 버마 정부는 갑작스레 휘발유와 경유 값을 2배 인상했고 시민들의 교통수단인 버스의 연료 천연가스 값을 무려 5배 올렸다. 이 사건은 지난 여름,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버마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시위를 촉발한 표면적인 이유는 물가 상승에 대한 불만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군부에 대해 오랫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낸 반정부투쟁이었다. 우리나라도 버마민주항쟁을 앞다퉈 보도했다. 이때껏 써온 국호 ‘미얀마’를 거부하면서 ‘버마’로 쓰겠다고 알리기도 했다. 버마 군부의 폭정과 무자비한 탄압, 시위대 살해 등을 비판했고 버마 국민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탄 슈웨가 이끄는 버마 군부는 국제 여론이나 자국 내 승려들의 반발에도 아랑곳없이 시위대에 총질을 가했다. 심지어 승려들을 구타하고 체포하기도 했다. 국민 90%가 불교를 믿는 불교 국가 버마에서 승려는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을 만큼 권위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 승려들까지 구타했다는 것은 버마 군부가 얼마나 잔혹한지 증명한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승려와 불교를 탄압함으로써 국민들의 의지처를 허물겠다는 군부의 의도가 담겨 있다. 결과적으로 군부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비단 지난 여름뿐만 아니라, 버마 국민은 무려 45년 동안 민주화 투쟁을 해왔다. 버마 군부에 ‘아웅산 수치 다음 가는 적’으로 꼽힌 스웨덴의 버틸 린트너의 ‘아웅산수찌와 버마 군부’는 지난 45년간 버마 국민들의 자유 투쟁 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아웅산 수치 여사가 있다.
버마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해가 1988년이다. 1988년 8월 8일 8시 8분(버마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숫자인 ‘8888’은 이때 생겨났다), 양곤 항의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1988년의 시위는 남녀노소, 인종을 망라하고 모두 참여한 국가 전체의 파업을 의미한다. 이 해에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국민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이 창당했다. 민주주의와 경제개혁에 대한 버마 국민들의 요구는 군부의 무차별 총격과 참혹한 폭행, 살해로 묵살되었다.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한 군부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가택연금했고 NLD를 와해시켰으며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을 체포·탄압함으로써 민주화운동 세력의 힘을 꺾어놓았다.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버마 군부의 끊임없는 와해 작업은 효과를 발휘했다. 승려들마저 군부에 구타당하는 마당에 버마 국민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버마 국민들이 유일하게 기대는 사람은 아웅산 수치 여사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버틸 린트너는 이 점이 버마 민주화 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자 한계라고 진단한다. 대부분 국민이 수치 여사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NLD의 지도부, 민주화 운동 세력마저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실을 타개하려 하기보다 “군부가 수치 여사와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러므로 수치 여사가 움직이지 못하면 국민들도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치 여사가 버마의 미래에 대해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아웅산 수찌의 견해는 늘 모호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는 버마의 자유를 위한 민주화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버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오해를 풀고 버마 민주화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 버마 민주화 운동은 성공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국민 역시 수십 년간 군부에 무참히 짓밟혔지만 거기에 무릎 꿇지 않았다. 버마의 사정과 우리나라의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따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 버틸 린트너 지음·이희영 옮김·아시아네트워크·1만6000원 |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