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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가난한 이민자엔 ‘좁은 문’

입력 2007.11.06 00:00

가족 재결합 이주신청자 ‘DNA 검사’ 조항… 저개발국 출신들 ‘인종차별’ 초래

프랑스의 새 이민 법안에 대해 반인종차별단체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프랑스의 새 이민 법안에 대해 반인종차별단체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프랑스 안팎에서 구설에 오른 일명 ‘유전자(DNA) 법안’이 하원에 이어 지난 23일 상원에서도 통과됐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가족과의 재결합을 희망하는 이민 신청자들에 대한 DNA 검사를 허용하는 내용을 두고 그동안 ‘반인권적 처사’ ‘나치 망령의 부활’이란 비난이 들끓었다. 우여곡절 끝에 새 이민 법안이 통과됐지만, 논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새 법안이 불법이민 근절을 외치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민통제정책의 결정판인지, 아니면 신호탄인지 우려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DNA 뒤에 숨은 이민 억제 의도 DNA 검사 조항은 야당은 물론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과 사르코지 내각 일부에서도 거센 저항을 불렀다. 사회당은 통과 직후 이 조항의 위헌 여부를 헌법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거듭 수정안을 제출하며 법안 통과에 열의를 보였던 사르코지 정부는 DNA 검사가 자발적 의사를 밝힌 경우에만 실시하고 친자 확인 절차를 간소하게 해 궁극적으로 이민 신청자들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안을 마련한 브리스 오르트푀 이민·국가정체성부 장관은 유럽연합 12개 국가가 유사한 조치를 시도하고 있다며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 이민 법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상 핵심은 가족 재결합을 비롯한 여타 이민의 조건을 까다롭게 해 이민을 강력히 억제하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민 신청자의 프랑스어 구사능력과 공화주의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평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 최저임금의 1~1.2배를 벌어들여야 한다는 재정 요건도 있다. 세계사회주의자웹사이트(WSWS)는 “이는 가난한 이민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사르코지 정부는 왜 이민 관문을 낙타가 들어가기는커녕, 찾기조차 힘든 ‘바늘 구멍’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프랑스가 노동력 조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경제 이민은 1970년대 경제 위기를 거치며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후 가족 재결합, 결혼이민, 난민 신청의 세 가지 형태로 이민자가 유입했는데, 프랑스 옛 식민지나 저개발국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다. 공공부문 개혁을 외치는 사르코지로서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이들이 달가울 리 없다. 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이민 2세대들의 분노가 폭발한 2005년 방리유 사태 당시 내무장관으로 강경 진압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 대신, 사르코지는 2005년 현재 7%에 머무는 숙련 노동 이민자를 50%까지 확대할 것을 주장한다.

‘뜨거운 감자’ 이민 2002년 이래 벌써 5번째인 새 이민 법안은 ‘이민’ 문제를 다시 한 번 정치 쟁점화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DNA 검사가 나치 시절 비쉬 정권의 우생학 정책을 연상시킨다는 우려가 흘러나왔다. 현대 사회 가족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생물학적 가족으로만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종교 지도자들은 ‘착한 이주민’과 ‘나쁜 이주민’을 구별하는 시도가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사회당 출신인 파델라 아마라 도시정책담당 정무장관은 법안의 DNA 검사 조항을 두고 “역겹다”고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 파문을 일으켰다.

사르코지 대통령과 오르토푀 이민국가정체성부 장관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과 오르토푀 이민국가정체성부 장관이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다.

시민사회에도 파장이 일었다. 상원 상정을 앞둔 지난 20일에는 이민자들을 비롯해 여러 시민, 인권 단체가 거리로 나섰다. 수도 파리와 프랑스 주요 도시에서 시위를 벌인 이들은 강제추방 중단과 불법 체류 합법화를 촉구했다.

과거 극우파의 전유물이던 이민 문제는 이제 우파와 좌파의 표밭이 된 지 오래다. 신설된 부처 이름처럼 이민과 ‘국가 정체성’은 지난 대선에서 양측 후보가 날카롭게 공방을 벌인 주제였다. 외국인이면 무조건 국가 정체성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을 강화할 것이란 경고는 외면당했다. 또 사르코지가 추후 직업, 유형, 출신지역별로 이민자를 제한하는 할당제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DNA 검사를 맹비난했던 사회당은 정작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이민자를 비판하는 일이 (극우정치인) 르팽의 지지표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이 때문에 나쁜 법안과 나쁜 정책, 불필요한 인간 고통이 초래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르코지 자신이 헝가리 이민자의 아들이라는 점은 의문을 증폭시킨다. 자기 성찰의 부족과 역사에 대한 모르쇠를 탓하는 목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사르코지는 지난 10일 프랑스의 이민 역사를 집대성한 파리 이민역사박물관의 개관식에 의도적으로 불참했다. 역사학자 파트릭 웨일은 “박물관은 프랑스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이들의 역사를 말해준다”며 “(대통령의 불참은) 프랑스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모욕이자 부인”이라고 비난했다.

숨죽인 이민자들 연이은 반이민 정책에 연말까지 불법 이민자 2만5000명을 추방하겠다는 사르코지의 공언 때문에 프랑스 불법 체류자들은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다. 10년 전 중국에서 이주한 M.L(27)은 그동안 단 세 차례, 자신이 사는 파리 20구 벨빌 밖에 나가봤다. 경찰의 불심검문과 강제추방 염려 때문이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은둔생활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르 몽드와 인터뷰에서 그는 “(사는 게) 쉽지 않지만 떠나고 싶지 않다. 내 삶의 터전은 여기다”라고 말했다.

사르코지가 장기간 체류한 이들에게도 프랑스어 능력 요건을 강화함에 따라 ‘언어’도 이민자들이 넘어야 할 새로운 장벽이 됐다. 지난달 찾은 파리 19구의 지역사회복지센터 ‘에스파스 19’는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불어 강의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 지원이 급격히 줄면서 넘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 박사과정 강진희씨는 “법을 바꿨으면 사람들이 이를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데 예산 삭감 등을 하여 이를 불가능하게 했다”며 “방리유 지역의 공공예산을 대대적으로 삭감한 즉시 방리유 사태가 일어났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국 안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프랑스. 차별을 우려해 공식적인 인종별 통계조차 집계하지 않지만 교육, 취업, 결혼 등 생애 전반에서 유색인종이 겪는 차별이 심각하다는 점은 프랑스식 공화주의의 험난한 노정을 말해준다.

<국제부┃김유진 기자 actvo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