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시나요? 한대수의 40년 음악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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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시나요? 한대수의 40년 음악인생

입력 2007.09.25 00:00

1집(멀고먼길), 3집(무한대), 박스셋, 베스트(위부터).

1집(멀고먼길), 3집(무한대), 박스셋, 베스트(위부터).

지난 일요일(9월 9일) 신촌의 모 카페에서 한대수 씨의 첫째 딸인 ‘양호’의 백일잔치가 있었다. 그의 가족들뿐 아니라 그간 음반, 공연, 사진, 책 작업을 통해서 친분을 쌓은 동료와 후배들 그리고 매체 관계자들이 참여한 ‘파티’였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몇몇 뮤지션은 즉석에서 어쿠스틱 기타 몇 대만으로 공연을 연 흥겨운 자리였다.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김도균과 김성민(선글라스)이 합주하는 ‘행복의 나라’가 들렸던 것 같고, 한대수 씨가 사람들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습을 얼핏 본 것 같다. 그는 17살 무렵인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며 ‘사랑과 평화’의 기치 아래 록과 포크를 폭발시킨 히피들과 어울렸고, 한편으론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응어리진 가슴을 쓸어안고 뮤지션의 꿈을 키웠는데 그때 만든 노래가 바로 ‘행복의 나라’라고 한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본 첫딸 백일잔치에서 그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다.

한대수는 음악 평론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대중음악 평론’을 가능케 한 무척 소중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음악평론가에게도 평론 ‘대상’이 있어야 평론이 가능한데 그게 바로 앨범(‘작품’으로서의 음반)이고, 한대수는 신중현과 함께 ‘앨범아티스트’로서 선구자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가슴네트워크와 경향신문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했는데, 왜 여기에 유명한 트로트나 댄스 가수들의 음반이 선정되지 않았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음악평론과 음악사연구, 앨범과 (단순)음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우문에 가깝고 어찌 보면 이게 한국 대중음악이 처한 현실이다. 사실 ‘음악평론가’ 입장에서 보면 한대수 이전에서 평론의 대상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1968년 미국에서 귀국한 한대수는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당시 생소했던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은 한국대중음악사에서 파격적인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싱어송라이터’는 진정성을 갖는 음악을 창작하기 위한 ‘방법론’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 청년문화가 개화될 때 김민기·양희은·양병집·서유석 등이 발표한 새로운 가치와 음악적 외관을 담은 앨범들은 한대수의 활동에 일정 부분 빚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대수의 디스코그라피를 살펴보는 일은 ‘한국음악창작자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과 같다. 그는 단지 머리 길고 ‘빠다’ 발음 나는 히피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에 대해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몰상식할 정도의 평가도 적지 않았고,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에 들어서다.

그런데 올해 2007년, 한대수의 음악인생이 40년(1968~2007)을 맞았다는 것을 기억들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2006년은 ‘음반 사전심의 철폐 10주년’이었는데 정태춘을 기억하지 않고 지나친 것처럼 올해도 한대수를 기억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누군가 꼭 한대수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을 제작하기를 바란다.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