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남은 가족들 무력감·과소비 경향에 이주노동 열풍은 사회문제로 대두
스페인 카나리 군도의 타하오 해변에 고기잡이 배를 타고 도착한 60명의 아프리카 이주자들을 스페인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카나리 군도는 유럽 이민을 꿈꾸는 수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나무보트 등에 의지해 들어오는 이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이주·이동의 흐름이 더 넓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 시대. 각국 이주자들의 본국 송금(remittances)은 현재 지구촌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한 축 중 하나다. 한국도 1960~1970년대 독일의 간호사·광부들과 중동의 건설노동자들이 현지에서 고국으로 부쳐온 피땀 어린 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경험이 있다. 얼마 전 ‘외국인 100만 명 시대’를 맞은 한국에서는 중국 동포들을 포함해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오늘도 땀 흘려 번 상당한 액수의 돈을 본국에 부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본국 경제를 일으키고 동시에 해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닌 송금문제를 최근 연속 기획으로 다뤘다. 이중 송금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아시아의 필리핀과 아프리카 세네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주 국가’ 필리핀의 그늘 필리핀은 해외로 간 이주노동자의 본국 송금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에 속한다.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800만 명이 해외에 있고, 이들의 송금은 지난해 중앙은행 집계 기준 필리핀 국민총생산(GNP)의 10%(약 128억 달러)를 차지한다.
현재 일본 도쿄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53세의 여성 ‘썽’은 무려 17년간을 해외에서 일해 본국에 송금했다. 미국·한국·홍콩·마카오·중국 등을 전전하며 번 돈으로 필리핀에 있는 다섯 자녀들을 고등교육까지 시켰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날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해 마음 한켠이 시린다. 썽은 “회의가 들다가도 필리핀 경제가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필리핀 이주자들은 본국에 부칠 돈을 마련하는 데 허리가 휘기 일쑤다. 이들이 송금하는 돈이 대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인 경우도 상당수기 때문이다.
도쿄에 사는 필리핀 여성 ‘피치스’(29·가명)는 도심 유흥업소에서 주로 일본 중년들의 술시중을 들어주고 진한 애무에도 분위기를 맞춰주는 일을 한다. 대학에 다니다가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겠다”는 생각에 엔터테인먼트 비자로 수년 전 일본에 처음 왔다. 그동안 여동생 네 명을 학교에 보냈고, 일본 남성을 만나 결혼도 했지만 여전히 업소에 나가고 있다. 본국으로 부칠 돈 때문이다. 남편은 오히려 자신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드니 반기는 눈치였다.
일본의 필리핀 노동자들은 연평균 1만 9000달러를 번다. 홍콩의 필리핀 가정부 수입의 네 배, 필리핀 평균 임금의 무려 19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돈’의 위력 때문에 한 번 이주 행렬에 가담하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
필리핀 가정과 국가경제의 지나친 송금 의존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혜택만큼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필리핀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무력감이나 과소비도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회복지학자 말루 알시드는 200만여 명의 어린이들이 양쪽이나 한쪽의 부모 없이 성장하고 있다면서 “아이들이 이주의 경제적 이득을 고마워하면서도 돈이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방황과 일탈 혼란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귀환 이주자들의 허브’ 세네갈의 명암 세네갈은 전체 인구 1100만 가운데 200만 명가량이 해외에 나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송금이 세네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7%였다.
인구 100만 명의 세네갈 제2의 도시인 투바. 거리무역상과 상인, 일용노동자들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된 이곳에서는 송금이 빚은 풍경을 관찰할 수 있다. 해외 이주가 성공의 척도가 되면서 어릴 적부터 투바인들은 ‘대박’을 꿈꾸며 이주를 동경하고 있다.
외화도 넘쳐난다. 시내 오카스 시장에서 매달 거래되는 각국 통화는 4만 달러 상당에 이른다고 거래자들은 전한다. 외국에서 한몫 잡은 것으로 알려진 소수의 ‘황금 소년’들은 BMW 등 외제차를 몰고다니기도 한다.
이주자들의 송금은 약한 정부를 대신해 학교 등 사회 인프라 구축에 쓰이기도 한다. 1960년대 다카르에서 말리, 그리고 리비아를 지나 유럽에 정착한 데임 엔디아예는 가죽 및 보석 중개상으로 성공을 거뒀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무리드파 이슬람(19세기 아마두 밤바가 창시한 세네갈 고유의 이슬람 종파로 자본주의적 노동과 윤리를 강조함) 사회에서 거물급 인사가 되기도 했다. 최근 투바로 귀환한 그는 자선단체를 운영하며 도시 개발에도 열성이다.
하지만 특히 청소년들이 포로가 된 세네갈의 ‘이주 열병’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다카르대학 이주문제 전문가 세리네 만수르 톨 교수는 “사람들은 이제 학교와 교육을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육을 통해 한 계단씩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이제는 바다만 건너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계층)상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금과 세계 경제 2006년 세계은행 조사에 따르면 개도국 이주민들의 본국 송금 액수는 약 2060억3000만 달러. 1990년보다 7배나 늘어난 숫자다.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송금의 영향력은 개도국에서 특히 크다. 송금이 외국 투자나 원조 규모 혹은 수출액을 훨씬 상회하는 국가들이 상당수다. 중앙아메리카는 커피나 바나나 수출보다, 모로코는 관광객 소비보다 본국 송금이 많다. 레바논·세르비아·아이티·통가·알바니아·자메이카 등은 모두 본국 송금이 전체 수출액을 합친 것보다 많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송금이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신용경색에 따른 금융시장의 불안 못지않게 세계에 파장을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가난한 자를 위한 금융혁신의 도구”라고 불릴 정도로 제3세계 시민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주자들의 본국 송금은 빈곤 퇴치와 취약 계층의 기회 제공이라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송금을 사회에 재투자할 경우 개도국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금이라 변동성이 적고 경기 순환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점도 강점이다.
그러나 송금 경제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송금이 대규모 이주로 공백상태가 된 국내경제를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또 외화의 대부분이 송금에서 나올 경우, 자국 통화 가치가 인공적으로 부풀려질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앞서 필리핀과 세네갈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나친 송금 경제 의존과 젊은 층의 노동 기피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는 문제로 불거질 소지마저 있다.
<국제부|김유진 기자 actvo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