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색채 강한 ‘튀는 발언’ 구설수
<일러스트 김영민>
행동은 말한 대로 하고 말은 생각한 대로 나오게 마련이다. 실언(失言)은 사고체제의 오작동이 아니라 잠재된 무의식의 외연화라는 주장이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지 모른다. 어떻든 이념에 관해, 역사적 사실에 관해 일관성 있는 발언이 이어진다면 무의식의 외연화라는 설득력은 더욱 높아진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또 다시 그런 종류의 실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는 8월 16일 국회 평화통일특위에 참석, 2002년 발생했던 서해교전에 대해 “결국 안보를 어떻게 지키느냐 방법론에 있어서 우리가 더 반성해볼 과제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심재엽 의원이 서해교전에 대한 의견을 울은 데 대한 답변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6명의 영령에 대한 고마움은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내재된 의식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행적을 되짚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재정 장관은 충북 음성에서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마을에서 최초의 개신교 신자였다. 이 점이 그가 성공회 신부가 되는 결정적 이유였다고 한다.
그는 종교인으로서 반유신 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진보 성향의 목회자모임인 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활동하면서 민주화, 인권 통일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특히 KNCC 인권위와 엠네스티 한국위원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민주인사들을 도왔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성공회대를 통해서였다. 12년 동안 성공회대를 책임지면서 성공회대의 ‘성공’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통혁당 사건 연루로 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가석방된 신영복 선생 등을 교수로 발탁했다. 민주화운동 경력 교수의 채용은 1998년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그는 또 대학 내 NGO대학원을 설립, 대학의 특성화를 성공시켰다.
그가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1980년대 서울의 봄 당시부터 김근태 의원, 이우정·박영숙 전 의원 등과 함께 김대중 비판적 지지파였다. 외곽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문역할을 했던 그는 1998년 김대중정부의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문했고 초선 시절에 정책위의장에 중용되기도 했다. 2002년 대선 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천정배 의원에 이어 두 번째로 ‘노무현 지지 의원’이 됐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때는 전국구 배지까지 버리고 신당에 합류했다. 불법 대선자금 10억 원을 받아 당에 전달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출감한 그에게 지난해 11월 통일부 장관 자리를 배려했다.
그는 일관되게 진보적 색채를 드러냈다. 꽃의 색깔이 고을수록 향기는 덜한 법이다.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마도 “NLL(북방한계선)은 영토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8월 10일·국회 평화통일특위) “김일성의 남침 규정은 부절적하다”(2006년 11월·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는 등의 이재정 장관의 튀는 발언에서 결코 감동을 얻지는 못할 것 같다.
<김경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