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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입력 2007.07.17 00:00

대선 승부처마다 등장, 이번 선택은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영포’(英布)를 닮았다.”
영포는 한고조 유방을 있게 한 5대 명신(영포, 팽월, 한신, 장량, 소하) 중 한 사람이다. 영포는 제갈량이 장비와 비교했을 정도로 용맹스런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 죄를 지어 얼굴에 먹을 입히는 경형(型)을 선고받았다. 그를 간혹 ‘경포’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 전 대표를 영포에 빗댄 것은 대선비자금의 ‘원죄’를 가진 서 전 대표가 경선의 선봉에 선 용감무쌍함 때문이 아닐까.

[1000자 인물비평]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서 전 대표는 정가에서 ‘의리와 신념을 겸비한 정치인’으로 통한다. 그만큼 그를 따르는 정치인도 많다. 이 때문에 200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그의 거취는 당연히 주목거리였다. 그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박근혜 캠프 상임고문)를 선택했다. 정치적 캐리어의 대척점에 섰던 박근혜 전 대표를 선택하자 정가에선 당연히 “왜”라는 질문이 뒤따랐다. 서 전 대표와 가까웠던 한 전직 의원은 “서 전 대표가 사면·복권에 집착했다”고 넌지시 일러줬다. 박 전 대표가 그의 사면·복권에 약간 도움을 행사했고 그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어떻든 서청원 전 대표는 대선의 중대 고비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97년 대선 땐 반이회창 전선에 섰다. ‘김심’(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음)을 업고 최형우 전 내무장관의 대통령 만들기 작업을 했다.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를 꾸려 경쟁관계에 있던 김덕룡 의원을 밀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교롭게도 최 전 장관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이수성 전 총리를 대안으로, 이 전 총리의 지지율이 부상하지 못하자 이인제 의원을 대타로 내세웠다.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 의원의 출마는 결국 이회창 후보의 낙선으로 이어졌다.

2002년 대선 당시 그는 ‘이회창 대선후보 만들기’의 일등공신이었다. 이회창 후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했다. 그 클라이맥스는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JP)의 한나라당 영입 작업이었다. 서 전 대표는 자신의 사위 집에 JP를 모셨다. JP가 좋아하는 양주 발렌타인도 준비했다. 그러나 미리 한나라당에 입당해서, 포스트 JP를 겨냥하고 있던 김용환 전 의원이 “내가 그럼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겠다”며 강력히 반발하는 바람에 서 전 대표의 회심의 작품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대선의 고비마다 성패의 길목을 지켰던 서 전 대표. 그가 박근혜 캠프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최일선 공격수 역할을 하고 있다. 서 전 대표는 “내 머릿속 일기장엔 이명박의 모든 것이 기록돼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기록’은 이 전 시장이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을 때의 일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당시 서 전 대표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다.

서 전 대표는 전언을 통한 공격, 더 나아가 기억력에 의한 공세까지 동원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박 전 대표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창업의 공을 세우고도 유방에게 토사구팽된 영포처럼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 김경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