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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사고뭉치’ 시민운동 새 장 열어

입력 2007.06.19 00:00

서경석 목사. 그의 삶은 열등의식이 긍정적 에너지로 바뀔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소년·학창시절을 짙은 열등의식에 젖어 보냈다. 서 목사는 사석에서 “어린시절에 참 키도 작고 못생겼다. 참 살기 싫었다”는 말을 자주했다.

[1000자 인물비평]운동권 ‘사고뭉치’ 시민운동 새 장 열어

그의 열등의식은 대학시절으로 이어졌다. 그를 주눅들게 한 사람은 서울고 동기인 박세일 서울대 교수. 박 교수는 운동권으로 촉망받는 인물로 성장하고 있었다. 서 목사의 꿈은 엔지니어였다. 목사도, 혁명가도 아니었다.

박 교수의 변신에 자극받은 서 목사는 대학을 휴학했다. 그는 “공대 분위기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하기 쉽지 않아서”라고 휴학 이유를 밝혔다. 이무렵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던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를 만나 본격적인 의식화 공부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서 목사는 사회변혁을 주도하는 혁명가로 변신했다. 공대 운동권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사회연구회’를 만든 것도 그다.

그는 장교로 입대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연루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이등병으로 강등 제대했다. 이런 아픔은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을 더욱 자극했다. 제대 후 그의 활동무대는 새문안교회였다. 사회변혁을 요구하던 청년들을 ‘기독교 우산’ 속으로 끌어들인 것도 서 목사였다.

좌파적 사회운동가인 서 목사의 변신 계기는 1980년대 초 미국 유학이었다. 그곳에서 “한국의 시민운동이 너무 교조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이것이 우파로의 전향적 계기가 된 것이다. 귀국해서 기독사회연구원장(기사연)을 맡은 그는 미국에서 배운 시민운동을 한국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를 잘 아는 한 인사는 “당시 서 목사를 보는 운동권의 시각은 ‘걸어다니는 사고뭉치’였다”면서 “서 목사가 스스로 파문을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늘 선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시민사회운동권에 토론작업이나 공론화 문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 목사는 그렇지 않았다. 치열한 토론 끝에 결론을 도출했다. 그 결론은 중도입장인 게 보통이었다. 운동권은 그를 ‘회색분자’로 치부했다. 그는 운동권에서 외톨이가 됐다. 고독함은 경쟁의식을 낳았다. 경쟁의식이 실용적 시민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그게 바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1989년 설립)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정책이 경실련 성공의 기초가 됐다. 토지공개념과 금융거래 실명제 같은 경실련의 주장을 김영삼 정부가 과감히 도입했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살아오고 고심 끝에 새로운 운동방식을 받아들인 서경석 목사.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 현재 뉴라이트 계열인 ‘선진화국민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그가 제이유그룹으로부터 3억 원의 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검찰수사 선상에 있다.

제이유그룹으로부터 받은 자금이 위법성이 있는지 여부는 검찰수사 결과를 봐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궁핍한 사회단체의 살림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사회단체의 자금은 더욱 투명해야 한다. 그의 삶처럼 돈문제에서 더 철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ay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