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덴탈리즘 & 율리시스



주간경향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옥시덴탈리즘 & 율리시스

입력 2007.04.03 00:00

옥시덴탈리즘

反서양주의, 서양서 먼저 일어났다

이언 바루마·아비샤이 마갤릿 지음·송충기 옮김·민음사·1만2000원

이언 바루마·아비샤이 마갤릿 지음·송충기 옮김·민음사·1만2000원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중심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동양의 진정한 가치와 힘에 대한 관심을 전 세계적으로 불러 일으켰다. 사이드는 명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동양의 이미지, 즉 동양문명과 동양인이 서양의 그것에 비해 보잘것없으며 심지어 미개하다고까지 인식하는 것은 서양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명쾌하게 밝혀냈다.

사이드는 서구 중심의 세계관·역사관에 함몰돼 있는 역사와 학문이 올바로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사이드가 물꼬를 튼 이래,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연구와 논의가 차츰 활발해지더니 이제는 많은 학자가 이에 합세해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구사회에 경도돼 있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에서 촉발된 서구 중심의 세계관·역사관에 대한 비판은 동양을 폄훼하는 시각을 바로잡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서구사회가 무조건 오만방자하고 동양에 비해 문명 수준이 월등하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이드의 작업은 서구사회를 전복하고 동양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모색이 아니라 갈등과 충돌을 넘어 서로 어깨를 겯고 함께 나아가기 위한 고민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서구 중심의 세계관·역사관을 비판하는 논의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이 ‘서양은 악, 동양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잣대에 현혹된다. 이는 반서양주의로서 에드워드 사이드 이전 서구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서양은 현명, 동양은 우둔’이라는 논리를 앞뒤 말만 뒤집어놓은 꼴밖에 안 된다.

이언 바루마와 아비샤이 마갤릿의 ‘옥시덴탈리즘’은 반서양주의의 기원을 찾는 책이다. 저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옥시덴탈리즘’이란 서양을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사상이다. 저자들은 서양에 대한 적대적인 인식과 그로 인한 행동양식이 어디서 연유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보여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의 근대화에서 초래됐다. 서양은 기계문명과 자본주의를 앞세워 동양을 탐냈고 서양의 완력에 밀려 손을 벌려야 했던 동양은 압축된 ‘근대’를 넋 놓고 받아들였다. 급속한 도시화·산업화와 물질만능주의의 틈에서 기생하던 비인간화와 정신적 황폐함이 본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신음하기 시작했고 몹쓸병의 책임을 서양에 돌렸다. 서양이 평화롭던 세상을 악하게 만들었다고 탓한 것이다. 옥시덴탈리즘이 서양의 기계문명을 적극 받아들였던 일본,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유독 두드러졌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옥시덴탈리즘은 애초에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먼저 일어났다. 윌리엄 블레이크, 프루동,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 서양의 ‘지성’들은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에 강하게 반발했고 심지어 서구사회를 반대하기까지 했다. 이유는 물론 사회가 점점 타락해간다는 데 있었다.

오늘날 옥시덴탈리즘은 더욱 거세다. 저자들은 옥시덴탈리즘의 중심에 이슬람세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서양의 강대국들이 중심이 돼 꾸미고 있는 ‘세계화’를 규탄하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의 출간은 9·11사태와 이슬람지역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자살폭탄테러 등이 계기가 됐다. 갈수록 빈번해지는 테러를 저자들은 반서양주의의 극단적인 예라고 본 것이다.

다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저자들은 결코 서양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작업처럼 이들 역시 공존과 공영을 위해 동·서양이 나란히 걷기를 바라고 있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



율리시스

난해한 고전, 다시 한번 도전해볼까?

[BOOK]옥시덴탈리즘 & 율리시스

문학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제대로 독파했을지 의문이다. 방대한 분량은 차치하고라도 ‘율리시스’를 통해 작가가 대체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간파해내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나마 작가의 의도가 궁금한 지점까지 도달한 독자라면 ‘율리시스’를 읽는 데 부분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어떤 이야기로 구성돼 있고 어떤 장면들이 펼쳐지는지조차 헤아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영미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며 후대 작가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인 ‘율리시스’를 몇 장 넘기다 그만 덮어버리거나 아예 펼칠 엄두조차 못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시스’는 계속 출간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말로 번역돼 국내에 출간된 가장 모범적인 ‘율리시스’는 범우사판 3권짜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3권을 한 권으로 묶어, 매우 두꺼운 ‘율리시스’가 출간됐다. 번역자는 평생 제임스 조이스 연구에 몰두해온 김종건 전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이다. 김 전 교수는 우리나라에 ‘율리시스’를 가장 원작에 가까운 형태로 소개한 인물이다. 범우사판 ‘율리시스’ 역시 그가 번역해낸 것이다. 김 전 교수는 제임스 조이스와 그의 작품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8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율리시스’에는 영어 외에도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가 혼재한다. 뿐만 아니라 고어, 은어, 비어, 속어 등 조이스가 ‘율리시스’에서 구사한 어휘는 수만 가지에 이른다. 무수한 언어만으로도 벅차게 마련인데, 조이스는 여기에다 ‘의식의 흐름’ 기법과 난해한 실험형식을 적용했으니 섣불리 번역했다가는 작가와 작품에 모욕을 줄 게 뻔하다.

김종건 전 교수는 기존 번역본에서 누락·간과된 부분을 보완하고 원작에 나타난 형식적 실험을 최대한 되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다시 한 번 ‘율리시스’를 번역했다고 한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블룸 부부와 예술가를 꿈꾸는 교사 스티븐 데덜러스, 이들 3명이 단 하루 동안 겪는 일을 묘사한다는 것, 엘리엇의 ‘황무지’가 탄생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사무엘 베케트 등 영미문학의 거장들이 본받았다는 것, ‘현대 인간 심리의 백과사전적 총화’라는 것….

이같이 ‘율리시스’에 관해 기초적인 지식만 달달 외고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차분한 마음으로 ‘율리시스’를 접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율리시스’를 읽으면서 성급한 마음은 금물이다. 비록 몇 년이 걸린들 어떠랴. 모두 무서워 돌아서는 작품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조이스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읽기 힘들지 않은 연작 ‘더블린 사람들’을 추천하고 싶다.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생각의나무 3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