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야만
20세기 역사에 숨어있는 야만성
클라이브 폰팅 지음·김현구 옮김·돌베개·3만 원
지난 100년 간의 발전은 실로 엄청나다. 20세기 과학기술의 진보는 1900년 이전까지 인류가 이뤄놓은 발전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치체제, 사상, 의식 수준까지 20세기 인류가 성큼성큼 걸어온 진보는 1900년 당시에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 이면에는 무자비한 야만이 도사리고 있다. 진보에 기대어 편의와 쾌락을 흔전만전 즐기고 있는 인류는 그 뒤에서 음흉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야만을 놓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보에 취해 야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
무릇 진보와 발전은 공평해야 마땅하다. 모든 사람이 그 이익을 평등하게 누리고 혜택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진보와 발전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적은 거의 없다. 오늘날에는 불평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해지고 있다. 진보와 발전의 세기인 20세기에는 야만이 보란 듯이 당당하게 활개를 치고 다녔다.
인류 문명사를 환경의 관점에서 서술한 저작 ‘녹색세계사’의 저자 클라이브 폰팅의 ‘진보와 야만’은 눈부신 진보의 세기로 알고 있는 20세기 역사에 숨어 있는 야만의 멱살을 잡고 덥석 끄집어낸다. 서구사회를 비롯한 선진국들이 저지른 야만을 폭로하는 책이기에 당연히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다.
폰팅은 20세기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1990년’과 ‘2000년’이라는 소제목을 단 글을 첫 장과 끝 장에 각각 배치하고 그 사이에 ‘환경’ ‘제국’ ‘전쟁’ ‘파시즘’ ‘억압’ ‘차별’ 등 주제를 달아 글을 나눠 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각 장의 글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 한 주제에 맞는 20세기 역사를 알고 싶다면 각 장을 따로 떼어내 읽어도 무방할 만큼 각 장은 나름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폰팅은 20세기 역사를 진보보다는 야만에 초점을 맞춰 서술한다. 물론 20세기의 진보를 몽땅 ‘나쁜 것’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신기술은 수억 명의 삶을 변혁시켰으며 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켰고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어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문제는 진보와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는 점이다. 진보와 부를 누리고 식량을 넉넉하게 챙겨먹는 부류는 전 세계의 상위 20%밖에 되지 않는다. 저자는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의 부의 80%를 향유했다. 이것이 아마 20세기의 가장 큰 야만성일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진정한 진보라면 중심과 주변의 격차가 줄어들었어야 마땅한데 20세기에는 중심과 주변의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졌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노예제는 이미 폐지됐지만 식민지배나 외국인 노동자 고용, 아동 노동 착취 등의 형태로 그 변종이 버젓이 살아 있다. 자동차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했지만 그에 비례해 교통체증이 심해져 마차시대와 비교해 통행시간이 단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정착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20세기 전 세계의 가장 흔한 통치형태는 독재였다. 전 세계의 전체 식량생산은 19세기 말과 비교해 3배 정도 증가했으나 기아와 그것으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1990년 대 무려 4000만 명이나 된다. 획기적으로 개선된 하수시스템은 극소수의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고 되레 냇가의 물을 떠먹으면서 살아도 별 탈 없었던 사람들이 냇물이 오염돼 더 이상 떠먹을 수 없게 돼버렸다. 20세기의 야만성이 정점에 달한 것은 차별과 박해를 넘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종교, 민족, 피부색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량한 세계시민을 학살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낱낱이 까발린 저자는 야만이 가득 찼던 20세기의 초상을 21세기에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을, 21세기는 전 인류가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
색채의 마력
파란색은 고대에 불길한 색이었다
우리는 색채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 모두 색채를 갖고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온갖 환경이 색채를 띠고 있다. 하늘, 땅, 나무, 꽃 등 자연도 물론 색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색채 앞에서 일반인은 수동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색채는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나 장인(匠人)하고만 관련 있고 평범한 사람은 예술가와 장인이 창조한 작품을 감상하고 이용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일반인도 색채에 꽤 능동적이다. 물건을 구입할 때 우리는 문양과 디자인도 감안하지만 그 이전에 색채를 먼저 보지 않는가. 나에게 혹은 선물할 사람에게, 우리 집에, 어떤 색이 더 잘 어울릴지 고려하지 않고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색채를 심리학 측면에서 다룰 수 있다.
우리가 색채에 심어놓은 편견 중 하나는 급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금색·흰색·파란색 등은 고결·순결한 색이고 검정색·회색 등은 저급하며 불결한 색이라는 것. 그러나 애초에 색채에 급이 있었을 리는 없다. 따뜻한 색, 차가운 색과 같은, 느낌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색채의 급은 사회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색채에 관한 급의 문제는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색채에 부여된 의미가 내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는 고착화되지 않고 정치·문화·종교 등의 관계에 따라 부침을 겪는다. 파란색을 예로 들어보자. 고대에 파란색은 불길하고 야만스러운 색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12세기에 성모마리아의 색으로 변하면서 일시에 고귀한 색으로 지위가 상승했다. 18세기에는 파란색이 낭만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시민의 색으로 자리 잡았고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국민의 색이 되었다. 이 같은 역사는 색채를 사회문화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색채는 각각 어떤 의미를 띠고 있을까. 어느 누구도 하나의 색을 두고 선뜻 ‘이런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현대사회는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해온 일본의 학자들이 함께 쓴 ‘색채의 마력’은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저자들은 저마다 전공과 관련해 색채를 문화사·미학·심리학·사회학적으로 풀어낸다.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데 색채를 동원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하마모토 다카시 외 지음 이동민 옮김 아트북스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