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전 총리 시민단체 결성 추진 파장… 당대당 통합 피하고 개별의원 영입 수순인가
고건발(發) 정계개편이 발동되는 것일까. 고 전 총리의 정치적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고건 전 총리가 지난해 6월 역대 도지사 초청 도정보고회에서 눈을 감고 있다.
5·31지방선거 이전에 고 전 총리는 정치권으로부터의 파트너십 요청에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고 전 총리와 가까운 민주당 신중식 의원은 5·31지방선거 직전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고 전 총리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히 고 전 총리에 대한 정치권 내의 우호적 분위기를 전한 것만은 아니다.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조짐으로 해석 가능하다. 아니나 다를까 지방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고 전 총리는 ‘희망한국 국민통합연대’ 발족을 공고했다. 물론 ‘희망연대’는 정치조직이 아닌 ‘시민운동단체’라는 전제는 따랐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고 전 총리는 견제의 대상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소위 ‘고건발 정계개편’이 시작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과 한화갑 대표 견제 나서
가장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서는 쪽은 민주당과 한화갑 대표다. ‘대권주자 고건’의 가치를 높여줬던 민주당은 가장 확실한 후원자였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광주·전남·전북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은 ‘고건을 대통령으로’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 특히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지지기반인 전북에선 그 정도가 더 했다. 호남지역 주민 10중 6명이 차기 대통령후보로 고 전 총리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절반은 당장이라도 고건 진영에 붙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내무관료시절부터 고 전 총리를 모셨던 최인기 의원, 경기고·서울대 후배인 신중식 의원, 그리고 언론계 출신으로 정치흐름에 밝은 이낙연 의원 등은 드러내놓고 ‘고건 중심의 정계개편론’을 폈다. 고 전 총리를 잠정적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 전 총리에게 민주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한화갑 대표가 의외 변수와 장애가 되고 있다. 한화갑 대표는 ‘고건 신당’ 합류 가능성에 대해 “민주당을 버릴 수는 없다”면서 “민주당의 50년 역사의 전통과 정강정책을 존속시킬 수 있으면 정치적으로 얼마든지 변신이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가 주장하는 민주당 중심의 정계개편 자체가 한 대표의 입지 허약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이낙연 의원은 “고 전 총리가 민주당의 후보가 됐으면 좋겠다”며 공공연히 ‘고건대권론’을 주장하고 있다. 호남주도권을 상실한 열린우리당의 반응도 곱지는 않다. 전북 출신인 장영달 의원은 “한 대표가 입지에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면서 “조순형 전 의원에게 서울 성북을 공천을 절대 안 하려는 것도 자기 입지를 생각해서 그렇다”고 분석했다.
또 최근 불거졌던 열린우리당 염동연 사무총장의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발언 해프닝도 결국 호남을 둘러싼 3자의 신경전의 한 자락이다. 열린우리당의 전남 의원들이 회동한 자리에서 이 문제가 공식 제기됐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게 선거공조 제기이유였다. 이는 정계개편의 향배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문제. 염 사무총장도 최근 당직자회의에서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제기했고 우상호 대변인이 해명한 것처럼 “염 총장의 혼잣말처럼 넘어갔다”고 한다. 이미 일단락된 문제라는 얘기다. 친노계 인사가 이런 사안을 언론에 흘려 정계개편의 논의를 막으려고 했던 것에 대해 정용택 민주당 원내실장은 “열린우리당 친노계 입장에선 당장 어떤 형태의 정계개편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 전 총리가 시민단체 형태의 사회운동단체를 추진한 것이 왜 이런 정치적 파장을 불러오는 것일까. 고 전 총리의 행보에는 여러 가지 복선이 깔려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독자적인 신당창당을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메시지가 강하다. ‘희망연대’ 결성으로 고 전 총리는 기존 정당의 부정적 이미지와 차별화를 꾀함으로써 정계개편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그 의도에는 당 대 당 통합논의를 피하고 개별의원 영입수순을 밟겠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국회의원에게는 대선보다 총선이 더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어느 누구도 지역정서가 떠난 당에 남아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만일”이라는 가정 아래 “탈당 물꼬가 터지면 열린우리당은 산산이 부서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초청해 만찬사를 한 후 박수를 치고 있다.
제한적인 인력풀 앞날 어둡게 해
그러나 고 전 총리 진영의 한 관계자는 “고 전 총리가 기존정당에 발을 담그지 않고 신당 창당 방향으로 전략을 구상한 것은 5·31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당연하고도 타당한 전략”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몇 가지 제한사항이 있어 고 전 총리의 전략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민주당과 거리를 두면서 향후 진행될 정계개편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중도실용·개혁세력의 연대라는 승부수를 던진 상태이다. 여야 정치권의 거듭된 러브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가 본격적으로 대권을 향해 고건호의 깃발을 올릴 적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많다. 김덕봉 전 총리공보수석은 “고 전 총리가 지방선거 결과를 보고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절감해 ‘희망연대’ 결성을 서두르게 됐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의 전도를 어둡게 보는 시각도 있다. 우선 제한적 인력풀이 그 이유이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명망가 위주로 했던 ‘미래와 경제’와 다른 컨셉트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용주의를 앞세워 일할 수 있는 젊은 전문가를 모셔오겠다는 것이다. 사실 시민단체 형태의 ‘희망연대’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인적 구성이 쉽지 않다는 게 고 전 총리 주변의 얘기다. 한 정치평론가는 “고 전 총리가 출마하겠다는 얘기도 하지 않고 있는데 어느 누가 자기 이름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면서 “더욱이 박근혜 전 대표 테러 이후 영남권의 고 전 총리 지지 분위기가 완전히 식었다”고 말했다. 잘못하다가는 국민통합과 실용주의를 내건 ‘희망연대’가 지역주의 틀 속에 함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세력을 얼만큼 붙일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인사는 “결국 정계개편의 물꼬는 ‘고건신당’이 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만일 정당을 만들지 못한다면 대권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 형태의 ‘정치적 쇼크’로는 정계개편을 주도할 수 없다는 얘기인 셈이다. 이낙연 의원도 “정치경험상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치현실은 곧 정치세력이고 그 정치세력은 국회의원의 동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