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錄환경운동25년]온산병 사태(2)캠에 ‘공해’를 몰고온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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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환경운동25년]온산병 사태(2)캠에 ‘공해’를 몰고온 4인방

입력 2006.03.28 00:00

공문연에 앞서 공해연구회 조직… 최열과 다른 시선으로 환경문제 파고들어

1979년 12월 온산공단 실태조사에 나선 공해연구회가 촬영한 사진. 어민들이 폐사한 패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1979년 12월 온산공단 실태조사에 나선 공해연구회가 촬영한 사진. 어민들이 폐사한 패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광복절 특사’가 나왔다. 1979년 8월 15일 조홍섭(현 한겨레신문 부국장·환경전문기자)이 출소했다. 이미 학부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취직해 있던 조중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대학가에 ‘공해연구회’라는 특이한 이너서클이 하나 생겼다.

조중래는 서울대 산업공학과 72학번, 조홍섭은 같은 대학 화학공학과 75학번이다. 서울공대의 양(兩) 조씨는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과는 다른 맥락에서 한국 환경운동사에 이름을 새긴 인물이다. ‘재야·시민운동의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캠(학생운동권)에 일찍이 ‘공해’를 도입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신치하 학생운동권에서 환경운동은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더라도 우습게 취급받았다. 공해연구회는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태동해 뒷날 학생운동가들의 대거 진출로 환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디딤돌 구실을 하게 된다.

끌려간 군대에서 찾아낸 ‘준비된 답’

1970년대 초·중반의 분위기에서 조중래가 환경에 눈을 뜰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처한 독특한 처지가 한몫했다. 조영래(변호사, 1990년 작고)의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운동권과 사찰 라인 양쪽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형한테까지 ‘견제’를 받았다. 최근 그는 “큰형님(조영래)은 본인이 뭘 하고 있는데 사이드에서 불거지면 안 되니까 자꾸 나를 눌렀던 것 같다”며 “그래서 형님 몰래 움직이다 나중에 야단맞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서울공대 운동권은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와 산업경제연구회(산경연)라는 이념서클이 양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동기인 이종원(현 일본 릿쿄대 교수)·백경진(현 참여하는 과학기술인연대 상임부대표)과 함께 산사연에 소속돼 있었다.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그로서는 뭔가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3학년 때인 1974년 4월에 터진 민청학련 사건은 그와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이종원은 학생회장에 당선되자마자 구속됐고, 그와 백경진은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는 긴급조치 4호가 해제된 뒤인 그해 9월에 검거돼 군에 끌려가게 된다.

최열이 감옥에서 진로를 놓고 고민할 때 그 역시 군대에서 같은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최열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제대한 즉시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1977년 3월 복학한 그는 수배 중에 그의 집을 찾은 이종원과 머리를 맞댔다. 다음 단계의 운동으로 무엇이 중요한가를 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눈 끝에 공해라는 ‘준비된 답’을 찾은 것이다.

이종원은 머리가 비상했을 뿐 아니라 선진 조류에도 민감했다. 그는 공학도지만 나중에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데, 당시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하고 나와 선교교육원에 다니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에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거기서 그는 조중래에게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외국의 선진 자료들을 공급하는 등 공해연구회의 코디네이터 구실을 하게 된다.

공해연구회가 기사연 이름으로 펴낸 3대 연구보고서. 왼쪽부터 ‘공해문제의 인식’ ‘한국의 산업화와 공해문제’ ‘우리 애들만은 살려주소’

공해연구회가 기사연 이름으로 펴낸 3대 연구보고서. 왼쪽부터 ‘공해문제의 인식’ ‘한국의 산업화와 공해문제’ ‘우리 애들만은 살려주소’

겁없는 여걸들 전국을 누비다

조홍섭은 조중래가 복학 후 학내에서 발굴한 후배였다. 조홍섭은 1980년대 이공대 학생운동의 르네상스기에 그 중심부에서 후배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학교 밖의 이종원, 학교 안의 조중래·조홍섭 등은 공해연구회를 만들기 이전부터 조중래의 서울 화곡동 집에서 스터디 모임을 가졌다.

1978년 복학한 백경진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 경제학자 츠르 시게토(都留重人)의 저서 ‘공해의 정치경제학’을 번역하는 등 이미 반공해운동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 중에 예기치 않은 사고가 터져 잠시 작업이 중단됐다. 사고란 1978년 10월 11일 발생한 서울공대 유인물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조홍섭이 덜컥 구속되고 만 것이다.

당시 서울공대 운동권은 다른 대학 뺨칠 정도로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워낙 인자가 많아 핵심 그룹도 A·B·C팀으로 나뉘어 있을 정도였다. A팀은 산경연, B팀은 산사연을 일컫는 말이다. A·B·C팀 모두 1970년 서경석(목사, 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 등이 만든 산사연에서 가지를 친 조직이었다. 산사연을 A팀이라고 하지 않고 B팀이라고 부른 것은 뿌리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A·B·C팀은 별도의 조직이라기보다 사람이 많아 분반시킨 형태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조홍섭이 활동하던 무렵에는 74학번 김부섭(현 큐빅테크 대표이사)을 리더로 하는 C팀이 가장 강팀으로 꼽혔다. 다시 말하면 조홍섭은 조중래의 공해 스터디 모임보다 C팀의 주력으로서 학내 운동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형편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됐던 것이다.

공해연구회는 조홍섭의 출소로 ‘화곡동 모임’이 복원되면서 1979년 9월 탄생했다. 이것이 학생운동권에서 태동한 첫 환경운동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뜻밖에도 여기에는 여학생 두 명이 가세하게 된다. 숙명여대 생물학과 77학번 단짝인 최영남(현 기독교 전도활동)과 황순원(현 캐나다 유학, 전 환경과공해연구회 부회장)이다.

공해연구회 시절 두 사람의 활동은 환경운동권에서 거의 ‘전설’이다. 여자의 몸으로 전국의 공해현장을 누비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화를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공해연구회의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공단지역 공해 실태조사였다. 최영남·황순원은 울산·온산·여천·반월 등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전국 공단을 샅샅이 훑고다녔다.

오염 현장에 접근해 몰래 사진 찍고 녹음하고 폐수를 채취하는 등의 행위는 보통 배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격한 몸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남자 없이 달랑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이런 현장에 간 적도 있었다. 전남 여천공단 실태조사 때의 일이다. 최영남의 기억을 빌려보면….

“그때 뭣 때문인지 순원이와 내가 거기 특파됐다. 밤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으려는데 시골이라 어디에 여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였던가? 여관을 소개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어 따라나섰는데 한참 가다 보니까 이상한 데가 나왔다. 금방 지은 듯한 아파트 단지만 달랑 보이고 허허벌판이었다. 벌벌 떨며 도망쳐서 어떤 가게로 들어가….”

공단 실태조사를 갔다가 팔려갈 뻔한 얘기는 뒤에 이들과 함께 활동한 환경운동가 사이에서는 유명한 일화다. 최영남은 “그때 우리는 겁이 없었다”며 “나중에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고 최근 회고했다. 1982년 결혼한 황순원은 만삭의 몸으로 현장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최영남의 말을 더 들어보면….

“울산·온산공단에 갔을 땐데 순원이가 우산을 펴들고 고리 원자력발전소 돔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어 ‘우리 아이들을 어찌 할 거나’라는 포스터를 만들면 좋겠다고 해서 둘이서 깔깔 웃은 적이 있다. 그때 순원이는 임신 8개월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숙명여대 운동권의 베이스캠프 격인 기독학생봉사단(이하 기봉) 출신이었다. 기봉은 종교적 외피를 썼지만 사실은 운동을 위한 서클이었다. 75학번 이향순(현 노동인권회관 교육상담역)·최재은(현 교사), 76학번 나영희(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본부장) 등 선배그룹이 기봉의 오픈(기존의 언더모임을 학내 공개서클로 등록하는 일)을 주도했는데, 가장 두터운 층을 형성한 세력은 77학번이었다. 최영남·황순원 외에 석원정(현 노동인권회관 부설 외국인 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소장)·전은주(김영환 전 과기부 장관 부인) 등이 77학번 핵심인자였다. 이 가운데 석원정·황순원·전은주 등은 재학 중에 시위를 주동,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최영남·황순원이 ‘겁없이’ 공해현장을 다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학생운동 경험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프락치가 있는지 먼저 살피고 싸움을 해야 할 때와 도망쳐야 할 때를 재빨리 판단해서 행동에 옮기는 기본기 정도는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반공해운동을 결심한 것은 3학년 때인 1979년 봄이었다. 학내 활동을 주도해야 하는 위치가 되자 각자 자신의 ‘필드’로 나가 운동의 외연을 넓히기로 한 데 따른 것이었다. 자연대 소속이던 두 사람은 자연대·가정대를 기반으로 ‘공해연구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조직을 오픈시키지는 않았다.

이들이 서울공대 조중래·조홍섭과 연결된 것은 새문안교회를 통해서였다. 두 사람은 이때 새문안교회 대학반에 나갔다. 당시 이곳은 대학 운동권의 소굴이었다. 종교적 믿음과 상관없이 ‘운동’을 할 목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최영남·황순원 역시 그랬다. ‘공해’에 관심을 둔 학생이 희귀하던 시절이라 이들이 조중래의 촉수에 걸려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공해연구회는 국내 최초의 환경운동단체로 불리는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보다 2년여 먼저 활동을 시작했다. 신문의 공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외국 자료를 수집·번역, 자료집으로 내는 등 기초작업도 그만큼 앞섰다. 공해 현장 답사나 실태조사에도 먼저 시작했다. 공해연구회가 온산공단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처음 현장조사를 실시한 때가 1979년 12월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해현장을 누비는 최영남·황순원(오른쪽). 이들의 무용담은 후배 활동가들에게 귀감이 됐다.

위험을 무릅쓰고 공해현장을 누비는 최영남·황순원(오른쪽). 이들의 무용담은 후배 활동가들에게 귀감이 됐다.

반공해 문화운동에서도 앞서

공해연구회가 이런 활동의 결과를 담아서 처음 낸 리포트가 ‘한국의 산업화와 공해문제’였다. 공문연이 출범도 하기 전인 1981년 11월 일이었다. 1982년에도 ‘공해문제의 인식’이라는 두 번째 리포트를 냈고, 1987년에는 온산병 사태의 종합보고서 격인 ‘우리 애들만은 살려주이소!’라는 책을 출간했다.

공문연의 기반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사선)라면 공해연구회의 그것은 기사연이었다. 당시 조승혁 원장(목사, 현 한국기독교사회산업개발원장) 체제의 기사연은 각종 자료와 프로젝트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공해연구회를 지원했다. 앞에 소개한 3권의 책자도 기사연 이름으로 나간 것이다. 조중래는 “조승혁 목사가 재정적 지원과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도록 계기를 제공했다”며 “나중에는 손학규 선배가 원장을 하면서 일정 부분 도움을 줬다”고 최근 회고했다.

손학규(현 경기도지사)가 기사연 원장으로 재직한 때는 영국 옥스퍼드대 유학에서 돌아온 1986년부터 이듬해까지다. 그는 ‘우리 애들만은 살려주이소!’의 서문에 “공해연구회는 1979년 결성돼 그간 공해문제에 관한 조사연구, 현지조사 등을 수행했으며 공해 비디오 및 슬라이드 제작, 공해연극 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환경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반공해 문화운동이다. 이 점에서도 공해연구회는 앞서 있었다. 1982년 9월 최초의 반공해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 ‘청산리 벽폐수야’가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공연됐는데 이 역시 공해연구회가 주관한 것이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반공해 활동을 먼저 시작한 공해연구회가 ‘국내 최초의 환경운동단체’의 지위를 공문연에 내주게 되는 사연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중래가 갖고 있는 환경·공해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환경·공해문제에 관한 한 그는 최열 못지않은 열정을 갖고 있었다. 공해문제로 운동의 진로를 설정한 뒤부터 그는 발이 부르트도록 공해현장을 찾아다녔다. 팀이 꾸려지면 같이 내려가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혼자서 훌쩍 떠나기도 했다. 얼핏 보아서는 최열과 닮은 듯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는 최열이 반공해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최열의 의도나 방법론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최열이 “운동권이 모두 노동운동으로 가서는 큰일나겠다”며 반공해운동을 결심했듯이 그 역시 “반공해운동이 모두 최열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최열이 추구하는 반공해운동은 정치투쟁의 요소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공해’는 그것을 위한 수단일 것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래서 좀더 순수한 측면에서 공해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공해연구회 4인방에게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조홍섭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조중래 선배가 우리는 최열식말고 다른 식으로 (반공해운동을) 하자고 했다. 당시 재야에서 하는 반공해운동은 정치운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열 선배가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이니까… 우리가 거기 들어가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공해연구회는 공단이나 공해지역의 실태조사를 벌이면서 주민 목소리를 녹음하고 현장을 슬라이드 필름에 담는 일을 매우 중요시했다. 바로 이런 활동이 최열식이 아닌 조중래식 반공해운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도 높은 슬라이드 작업에 동원돼 팔려갈 뻔했던 최영남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하는 것은 시민운동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기술적 측면으로 (시민운동을) 보호해주는 쪽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중래 형(1970~1980년대에는 대학가에서는 남자 선배를 오빠가 아니라 형이라 불렀다)이 ‘연구풀제’라는 얘기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한 시간짜리 슬라이드를 만들어 ‘이걸 공유한다, 시민운동으로 발전하게’라고….”

공해연구회는 1989년 환경과공해연구회(현 회장 장영기 수원대 교수)로 재출범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8년 공해추방운동연합, 1993년 환경운동연합으로 환경·공해운동조직이 대통합하는 흐름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고수한 셈이다. 조중래는 이에 대해 최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공해연구회 창설멤버 4인방. 왼쪽부터 조중래·조홍섭·최영남·황순원.

공해연구회 창설멤버 4인방. 왼쪽부터 조중래·조홍섭·최영남·황순원.

전문성으로 시민운동을 보호하자

“가장 큰 문제로 생각한 게 전문성이었다. 모든 단체가 시민운동단체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운동의 다양성도 필요하고, 전문성을 챙기는 쪽도 있어야 했다. 운동체로서의 조직은 공추련이나 환경연합으로 족하다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공해연구회 시절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이 실은 전문성이었다. 반공해운동을 위해 대학원 진학까지 포기했던 그는 얼마 안 가서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스터디 모임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란 게 얼추 주워들은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서울시립대가 여름강좌로 개설한 수질측정기사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학습으로는 한계를 더 절감할 뿐이었다.

이 무렵 그의 큰형 조영래는 대학원에 다녔다. 동생이 ‘분야’를 바꾼 뒤 마음이 편했던지 그는 공해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석사학위 논문이 ‘공해소송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1981년)고, 뒷날 유명한 ‘박길래 사건’의 소송대리인으로 나선 것 등이 그 증거다.

결국 조중래는 유학길에 오른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1982년 9월 미국으로 떠나 4년 만인 1986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그런데 갖고온 아이템은 ‘환경’이 아니라 ‘교통’이었다. 막상 미국에 가보니 환경분야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통공학은 환경·교통·주택문제라는 세 가지가 얽히는 문제다. 주저하지 않고 도시문제를 선택한 것은 환경의 주변문제라고 생각해서였다. 세 가지는 도시의 문제로 한 틀 속에 있다. 서로 부딪치는 문제가 많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누군가가 통합·조정하는 것도 운동의 한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조중래의 최근 회고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공해연구회와 그 주변에는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그것은 조홍섭을 정점으로 한 신세력의 등장이었다. 새내기 예비 환경운동가들이 제기한 새로운 화두는 조홍섭마저 곤혹스럽게 만들고, 공해연구회는 물론 공문연까지 뒤흔들며 반공해운동에 보이지 않는 대격랑을 예고하는데….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