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접촉 잦은 정치권이 주로 활용… 정보에 ‘의도’ 담은 뒤 슬쩍 흘려
2002년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NSC 내부인사가 언론플레이를 통해 그 결정(전략적 유연성)을 뒤집어 보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조선일보 2월 3일 사설)
이 사설은 ‘여당의원(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이 NSC 문건을 이렇게 시리즈로 폭로하고 있다면 NSC 내부 인사가 의도적으로 문건을 넘겨주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 이것을 언론플레이라고 했다.
1월 21일 최광식 전 경찰청 차장의 수행비서인 강희도 경위가 자살하자, 경찰 측에서는 “검찰의 표적수사와 언론 플레이가 죽음을 불렀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찰이 거물급 브로커 윤상림 씨 사건을 수사하며 최 전 차장의 이름을 언론에 ‘흘렸다’는 것. 검찰측은 언론플레이는 억측에 불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사권 조정을 놓고 검·경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제기된 쌍방의 주장에는 언론플레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내가 하면 무조건 ‘언론 홍보’
황우석 박사의 ‘언론플레이’와 더불어 최근 언론을 통해 자주 나타나는 이 용어는 정작 국적불명의 언어다. ‘언론플레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한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책 서문에서 ‘혼혈 단어’라고 지칭했다. 이 혼혈 단어는 신문기사와 사설은 물론 기사 제목에까지 사용될 정도로 친숙해졌다.
유행어·신조어·사투리 등을 담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오픈 국어(사전)’를 검색하면 언론플레이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강 교수는 책에서 언론플레이를 ‘홍보 또는 PR의 속된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도준호 교수는 “언론플레이란 자기가 의도를 갖고 언론을 이용하려는 행동이란 점에서 영어로는 manipulation(조작)에 가깝다”고 말했다. 언론홍보·PR의 경우는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홍보’하는 긍정적인 의미가 많은 반면 언론플레이는 사실을 은폐하고 과장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1월 18일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연설을 했다.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채백 교수는 “누구든지 언론을 수단으로 홍보하고 활용하고 싶어하며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하지만 확인 절차 없이 이를 따라가는 언론의 관행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독 정치권에서 언론플레이가 많이 행해진다. 언론과 접촉이 잦고 언론의 이런 생리를 잘 아는 정치인에 의해 언론플레이가 이뤄지기 때문.
정치권에서는 과연 어떻게 ‘언론플레이’가 이뤄질까.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는 정치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 때문에 반대편 진영의 언론 홍보를 ‘언론플레이’라고 몰아붙인다.
최근 전당대회 결전을 앞두고 있는 정동영·김근태 후보 진영은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설 휴일의 마지막 날인 1월 30일 김근태 후보는 11시에 열린우리당 당사에서 정책 기자회견을 계획하고 있었다. 김 후보 측은 “이미 설 연휴 전에 일정을 통보해 놓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40분 전인 10시 20분에 같은 장소에서 정동영 후보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정 후보는 여기에서 20대 민생과제를 설명했다. 11시 발표할 김 후보의 4대분야 12가지 과제 약속과 비교할 만한 내용이었다.
김 후보측은 “김 후보가 오래 전부터 계획한 기자회견의 앞 시간에 정 후보가 갑작스럽게 끼어 들었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서로 예의는 갖춰야 한다”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정 후보 측에서 상대방의 김을 빼는 언론플레이를 펼쳤다는 것이 김 후보측의 시각. 이에 대해 정 후보 측은 “연휴가 끝나면서 기사 거리가 없는 기자들을 위해 연휴 마지막 날 11시 기자회견을 계획했다”면서 “하지만 김 후보의 기자회견이 있어 10시 20분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후보 측은 이날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된 것일 뿐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치 관행”이라면서 “신경전도 아니며 언론플레이는 더 더욱 아니다”라고 말했다.
휴일인 만큼 별다른 기사가 없는 상황에서 일요일이나 휴일 마지막 날의 기자회견은 기자들에게도 좋은 기사 거리를 제공하고, 당사자는 기자회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을 연출한다. 설 연휴 마지막 날 기자회견을 서로 하려 했던 양측도 긍정적인 의미의 ‘언론플레이’를 한 셈이다.
상황에 대한 ‘내멋대로’ 해석
김 후보측은 2월 1일 10시 김 후보가 국회 기자실에서 지방선거 필승 3대전략과 3대 카드를 발표하기 바로 직전 정 후보 측 선대본부장인 박명광 의원이 기자회견을 가진 것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시각을 갖고 있다. 이날 박 의원은 김 후보의 나중 발표 내용과 비슷한 지방선거 승리의 복안을 제시했다.
양측은 예비경선전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도 ‘거의 비슷하다’(정 후보측), ‘아직 차이가 많이 난다’(김 후보측)는 ‘엄살’을 기자들에게 털어놓아 서로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2년 대선 당시 김대업씨(맨 오른쪽)가 한나라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동안 들어와 이를 반박하고 있다.
대권주자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양측은 2004년 총선 직후 통일부 장관 직을 놓고서도 신경전을 벌였다. 이때 한 일간지에서는 개각을 전망하면서 김 후보가 통일부 장관에 유력하나 가족의 월북 문제 때문에 다른 자리로 돌린다는 얘기가 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김 후보측은 “정 후보의 한 측근이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당시 확인했다”고 말했다. 기자들에게 나쁜 이야기를 ‘흘려’ 통일부 장관행을 막았다는 것이다. 정 후보측은 당시 상황에 대해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했다. 당시 두 후보가 입을 닫은 가운데 양측의 측근들이 기자에게 상대 측을 비난하는 일전을 벌인 것도 ‘언론플레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야간, 청와대와 야당 간에는 이보다 더욱 심한 언론플레이가 치열하게 펼쳐진다. 한나라당은 1월 18일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연설을 대표적인 언론플레이로 손꼽았다. 밤 10시 3개 지상파 TV에서 방송된 데다 조금 뒤인 11시 30분 한국과 아랍에미레이트의 축구경기가 있었기 때문. 연설장소를 청와대가 아닌 백범 기념관으로 한 것도 논란이 됐다. 한나라당 이정현 부대변인은 “가장 공식적이어야 할 청와대가 이와 같은 비공식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라고 비난했다. 이 부대변인은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에서 주요 이슈를 일요일에 기자들에게 발표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기사가 부족한 일요일을 이용해 기사거리를 제공,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일주일 내내 청와대의 이슈를 이끌어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부대변인은 필요 이상의 정권 홍보, 악재의 관심 돌리기, 한나라당에 불리한 뉴스 부각, 보도 타이밍 조절 등이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언론플레이 형태로 손꼽았다. 이런 언론플레이의 배후로는 언론인 출신인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지목했다.
의원들이 화장실에 가는 이유?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이 2004년 ‘월간조선’의 보도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열린우리당에서 문제삼는 한나라당의 언론플레이 중 가장 최근에 부각된 사례는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 사건. 1월 27일 서울고등법원은 ‘김 의원이 자신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소개한 것은 허위사실 공표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한나라당의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7월 만주지역에서 찍은 영상물을 기자들에게 공개하면서 ‘현지 조사 결과 김희선 의원의 부친이 독립군을 탄압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은 이 영상물이 ‘월간조선’에서 이미 보도된 내용과 비슷하며, 같은 증인을 인터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은 여기에다 만주국 경찰임을 입증하는 재직증명서와 공문서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증거를 공개했다. 서영교 부대변인은 “영상물을 녹취한 결과 ‘월간조선’ 인터뷰와 같았으며 몇가지 사실을 연결해 ‘김 의원의 부친이 독립군을 탄압했다’는 사실을 억지로 꿰맞췄다”고 말했다. 서 부대변인은 “중국 현지의 영상물을 공개하면서 기자들에게 잘못된 사실관계를 브리핑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수차례 공방이 오갔지만 이 논란은 법원의 재정신청 기각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의혹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는 입장이다.
여야간 가장 심한 언론플레이가 행해졌던 기간은 대통령 선거 운동 시기. 2002년 대선에서 양측은 비방전을 일삼았다. 병역비리 파동에서 김대업 씨는 특유의 언론플레이로 기자들을 사로잡았다. 김 씨는 호의적인 기자에게 특정 정보와 자료를 단독으로 흘려주는 수법을 사용하곤 했다. 한나라당 이정현 부대변인은 “병풍을 비롯해 총풍·세풍·안풍 등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면서 “이런 것이 여당의 전형적인 언론플레이였다”고 비난했다.
양측에서는 상대방 후보에 대한 약점을 하나 둘씩 흘려 기자들의 취재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정보 중에는 소문과 낭설에 불과한 것도 많아 기자들이 허탕을 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여야간의 싸움에서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들의 개인적인 언론플레이도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몇몇 국회의원은 의원총회에서 중간에 슬쩍 빠져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나와 밖에서 의총 내용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몇 가지 토론 내용을 흘려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언론에 자주 ‘노출’시키고 기자와 친분도 쌓는다. 또 다른 부류의 국회의원은 청와대·국정원·검찰 등의 정보망을 이용, 친분 있는 기자들에게 뉴스 거리를 던져준다. 기자들은 중요한 소스가 나오는 국회의원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비공개회의의 내용도 기자들에게 흘려주는 국회의원·보좌관·당직자를 통해 1시간 정도가 지나면 대부분 파악된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나온 대화조차 하룻밤 사이에 기자들의 귀에 흘러들어온다. 누군가의 ‘언론플레이’에 의해 나오는 정보들이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