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에 발 내딛자 지지율 추락… 당대결로 변한 대선구도에서 그의 선택은
고건의 지지율이 하락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9월 27일 차기대권주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고 전 총리는 27.9%를 기록했다. 두 달 전 조사(7월 26일)와 비교해 7.2%P 하락한 수치다. 고 전 총리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줄곧 3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다 20%대로 추락했다. 반면 이명박 시장은 두 달 전에 비해 5.2%P 상승, 20.3%를 기록했다. 고 전 총리를 추격할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들어선 셈이다. 다른 여론조사기관에선 이 시장이 1위를 차지했다. ‘고건 하락-이명박 상승’이 맞물려 차기 대권구도는 당분간 2강이 선도하는 구도로 바뀌었다.
정치혐오가 만든 부동의 1위
고 전 총리의 지지율 하락은 두 가지가 맞물려 있다. 하나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라당 이명박 서울시장의 급부상이다.
특히 중부권신당 행사 참여는 ‘고건-심대평-민주당 한화갑’의 연대 가능성을 짙게 풍겼다. 고 전 총리는 “개인적 친분관계에 의한 불가피한 참석”이라고 해명했지만 국민들에게 현실정치 참여로 비쳐졌다. 결과는 지지도 급락으로 나타났다. 고 전 총리 지지층을 구성하는 ‘무당층 거품’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높은 지지율은 반사이익에 의존한 것이다. 노 대통령의 불안정성, 무당층의 정치혐오증이 만들어낸 것이다. 부동의 1위이면서도 현실정치권과 차기대권구도를 주체적으로 요리할 위치를 잡지 못하는 한계와 딜레마의 원인이다. 역시나 현실정치에 발을 내딛는 순간, 한 축의 거품이 꺼졌다.
고 전 총리의 또 다른 지지기반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지층이다. 고 전 총리의 독자적 정치 행보는 양당 지지층의 이반을 불러올 요인이다. ‘어, 우리 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양당 지지층의 거품’이 빠지는 계기다.
기존 정당 지지층의 변화를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가 이명박 시장의 부상이다. 이 시장은 청계천 완공을 계기로 업적과 추진력을 내세워 한나라당의 유력주자 자리를 꿰찼다. 한나라당 지지층으로선 승리를 기대해볼 수 있는 후보를 가진 셈이다. 한나라당 지지층에게 더 이상 고 전 총리는 눈독을 들일 대상이 아니다.
이 시장의 부상과 고 전 총리의 하락은 대선구도를 바꾸고 있다. 그간 차기대권구도는 인물대결구도였다. 고 전 총리 외에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열린우리당 정동영, 김근태 등 고만고만한 후보가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절대우위를 차지한 당내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인물구도는 합종연횡에 의한 대선구도의 변화가 언제라도 가능했다. 이 구도에서 고 전 총리의 효용가치는 극대화된다. 고 전 총리는 어느 당, 누구와 짝이 되도 흥행에 성공할 카드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강력한 주자의 부상은 인물구도에서 당 대결구도로 전환을 의미한다. 한나라당에 맞설 범여권의 경쟁력 있는 후보가 누구냐로 초점이 좁혀진다.
이는 앞으로 고 전 총리 지지도에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 정파를 초월한 후보의 자리는 이제 끝났다. 부정적 영향이다. 이제 그보다는 한나라당에 대항할 유일한 대항마로서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정 창교 수석전문위원은 “열린우리당 지지층에선 고 전 총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지지도가 당분간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그래서 나온다.
여기에서도 고 전 총리의 지위는 여전히 반사적이다. 대선구도와 각당의 상황에 종속돼있다. 그래서 여전히 변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고 전 총리의 행보는 현실정치권과 국민지지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현실정치권, 특히 범여권은 고 전 총리를 현실정치권으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최근 창당을 공식선언한 국민중심당(가칭)과 민주당이 1차로 필요로 한다. 민주당 신중식 의원은 “지역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방적 구애든, 짝사랑이든 고건과의 연대를 계속 노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은 혼자서 입당, 맨주먹으로 민주당의 대권후보를 관철했다”며 고 전 총리에게 링 위로 올라와 정면승부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열린우리당 역시 내부에서 ‘고건 영입론’이 나올 것이다. 내부 위기감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내부 차기주자 견제용으로 쓸모가 크다. 여권 내 차기주자들과 차기전대로 대립하고 있는 문희상 의장의 한 측근은 고건 영입론에 대해 “당 내부 인적 자원으로 안 된다면 반민주, 부패인사를 제외하고 영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 내부 상황, 차기대권 구도에 따라 언제라도 영입론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얘기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최선’?
현실정치권과 고 전 총리의 셈법은 정반대다. 현실정치권은 고 전 총리를 요구하지만, 고 전 총리로선 움직일 수 없다. 높은 지지도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경선을 전제로 한 영입 또한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다.
최근 지지도 급락에 따라 고 전 총리 진영에는 비상이 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 전 총리의 현실정치 행보는 진영 내 ‘현실정치 참여파’에 의해 주동됐다. 정치인들이 주축인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와 맞물려 신당 참여 등 현실정치 참여를 주장했다. 이에 반해 ‘신중파’는 현실정치와 거리를 둔 행보를 주장해왔다. 고 전 총리의 유일한 경쟁력은 국민 지지도다. 이를 지렛대로 차기대권구도가 요동칠 때 단숨에 중심부로 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지렛대는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는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도,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탈정치 지지도를 유지하는 것. 이를 위해선 현실정치와 관련,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최선이다. 최근의 지지도 급락은 고 전 총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차기대권을 위한 고 전 총리의 결단은 지금으로선 지방선거 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상수냐 변수냐가 이때 결정된다. 이제 고 전 총리가 상수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좀더 복잡한 방정식을 요구한다. 차기대선구도가 당 대결구도로 바뀌면서다. ‘이명박 대세론의 지속’, ‘여권 차기주자들의 약세 지속’과 ‘고 전 총리의 지지도 유지’라는 세 개의 축 가운데 하나라도 허물어지면 고 전 총리의 입지는 또 다시 표류하게 된다.
민주당 신 의원은 “고 전 총리는 여전히 웨이트 앤 시(Wait and See)”라며 “92년 이후 모든 대선이 3자구도로 가다 막판 양자구도로 좁혀졌다. 그것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 대선에서의 DJP연합, 2002년 대선에서의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같은, 대결 전선의 중심으로 단번에 진입하는 그림을 내심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손태복〈내일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