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앞치마 두른 남자들 살림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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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앞치마 두른 남자들 살림 늘었다

입력 2005.09.27 00:00

대중문화 속 남성전업주부, 서툴고 무능한 모습에서 노련한 프로주부로

[문화]앞치마 두른 남자들 살림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7월 현재 취업할 의사가 없이 가사활동을 하고 있는 국내 남성전업주부 수는 전국적으로 11만1000명. 여성 전업주부 508만6000명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지만 과거에 비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더욱 두드러진 현상은 단순한 숫자의 증가보다 자신이 전업주부임을 당당히 밝히는 남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 가사활동을 하는 남성 인구가 지난해를 기점으로 현격히 증가(2003년 6만9000명, 2004년 12만8000명)한 데는 경제 불황의 여파도 있으나 남성 전업주부 스스로의 인식변화도 한몫을 했을 것이라는 게 통계청 직원의 얘기다. 이들의 인식변화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엔 직장남성들 역시 육아를 여성 전유물로 생각하던 고정관념에서 탈피, 남성육아휴직을 통해 가사경험과 자녀양육에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차츰 변화

달라진 사회상은 대중문화에도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문화는 사회상을 좇아 담아내거나 리드한다고 했던가. 최근 TV드라마나 스크린에서 앞치마 두른 채 살림을 하는 남성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최근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한다. 또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느낌도 달라지고 있다.

실직한 남편과 바람난 아내의 모습이 담긴 1999년 영화 ‘해피엔드’의 최민식부터 2001년 영화 ‘조폭마누라’에서 조폭 두목의 남편으로 닭살스럽게 아내를 내조하는 수줍은 남편 박상면, 서울의 중산층 아파트에 사는 30대 부부 세 쌍의 가정과 외도의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 MBC 드라마 ‘앞집여자’의 이두일, 그리고 올봄 시청률 30%를 넘으며 인기를 끈 SBS 드라마 ‘불량주부’의 손창민까지. 집에서 살림하는 남성들 모습이 의기소침하거나 어둡고 우울한 데서 밝고 명랑한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피엔드’에서 최민식은 은행에서 6년간 일하다 실직한 인물로 나온다. 아내 대신 딸을 돌보고 만화방에 쭈그리고 앉아 만화책도 읽고 음식도 만들고 분리수거 요령도 터득해가면서 새삼스레 맛보는 일상의 한가로움을 즐긴다. 하지만 아내가 옛 애인과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을 모른 채 전업주부로서의 일상을 보내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 눈에 애처롭다 못해 한심하게 비친다. ‘얼마나 무능하고 못났으면…’이다. ‘조폭마누라’의 박상면은 동사무소 말단직원이긴 하지만 터프한 아내 대신 아내의 속옷을 빨고 밥상을 차리는 등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한다. 침대에서 부부관계를 맺을 때도 아내가 주도하고 남편은 수동적이다. ‘살림하는 남자=여성적’이라는 등식을 연상케 한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아내 대신 살림을 하는 ‘앞집 여자’의 이두일도 착하고 매사 수동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조폭마누라’의 박상면과 비슷하다.

[문화]앞치마 두른 남자들 살림 늘었다

9월 29일 개봉 예정인 영화 ‘미스터주부퀴즈왕’은 남성주부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이들 작품보다 한 단계 더 도약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유선동 감독이 연출하고 한석규, 신은경이 주연한 이 영화는 ‘불량주부’가 아닌 ‘프로주부’가 주인공이다. 극중 한석규는 자신만의 살림 노하우를 지닌 베테랑 전업주부로 아이 양육에도, 아내의 내조에도 일가견이 있는 남성전업주부로 분한다. 아파트 동대표를 역임하고 어머니와 함께 김장을 담그고 각종 생활상식도 꿰뚫고 있다. 영화는 그런 그가 퀴즈쇼에 출연해 일약 스타가 되면서 벌어지는 부부간 갈등과 화해를 경쾌한 코믹터치로 다루고 있다. 유선동 감독은 “20세기가 여성해방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남성들이, 남자는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도 잘 벌어야 한다는 식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라며 “제 영화의 주인공이야말로 그런 강박증에서 벗어난 캐릭터”라고 이 영화의 기획 및 연출 배경을 설명했다.

“여성지위 상승하면서 나타난 현상”

이처럼 남성전업주부의 대중문화 출현에 실제 남성전업주부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이 영화 홍보대사로 나서기도 한 9년차 프로주부 ‘인천댁’ 차영회씨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성전업주부를 자주 보여줌으로써 공론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또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차씨는 또 “중요한 것은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우리 사회 주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소외감”이라며 “단순히 가십성이 아니라 주부의 일이 부부 중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일이라는 공감대도 남성전업주부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일반에 형성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유지나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는 “남성전업주부를 희화하거나 지나치게 우울한 초상으로 묘사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어느 한쪽만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전업주부를 미화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전업주부들을 그린 영화가 나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상승하면서 나타난 사회적 변화를 담아낸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런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여성이 종전의 남성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이제 거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반해 남성이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금기에 해당한다”며 “남성이 종전의 여성 역할에 해당하는 살림을 한다는 소재가 채택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사회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심씨는 또 “상업영화는 남자가 치마를 입는 것이나 전업주부로 사는 것 등 사회적 금기를 다룰 때 자칫 허용적 태도로 비춰질까봐 대체로 코미디로 포장해 이를 풀어간다”며 “시간이 흘러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면 남성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대중문화가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이를 담아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