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숫자에 가려진 사람들이 중요한 이유

사람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할 때 숫자로 계량할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의식적으로 벗어나려 해도 우리는 어느새 다시 그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2009년 5월 18일,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잠든 첫 밤의 기억이다. 훈련소의 관물대에는 사격 연습용 표적이 붙어 있었고 표적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소총 사격의 표적이야 그냥 그림이지만, 그것은 혹시나 내가 전장에서 만날 수도 있는 한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10발 중 몇 발을 맞혔다’는 무용담 속의 숫자로나 기억될 사람, 그에게도 나름의 꿈과 희망이 있을 것이다. 표적지가 수십 개씩 붙어 있는 방에서 2년간 생활하면서, 나는 표적지에 그려진 것이 사람의 형상임을 잊지 않으리라 몇 면이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사람의 다짐이란 것은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상황 앞에서 흔들리게 마련이다. 개인을 넘어선 힘은 의지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 우리의 실제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이런 외적 요인일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할 때 숫자로 계량할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의식적으로 벗어나려 해도 우리는 어느새 다시 그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몇 명을 정리하면 회사가 이만큼 나아질 것이다” 같은 표현이 참 우습다. 사람도 생물도 아닌 회사와 국가는 수혈도 받고 살도 빼서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진짜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짐짝처럼 처분된다. 그러나 그 숫자 뒤에 삶이 있다. 해고 대상자가 된 사람이 한 명이든 100명이든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돕고, 도움을 받기도 하고, 치킨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기도 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이것이 ‘사람은 물건’이라는 은유가 우리 눈을 가려 못 보게 만드는 현실이다.

숫자 뒤에 가려진 사람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으로 이것은 도덕적 가치다. 모든 사람의 존엄함이 승인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살기 힘든 곳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이것은 안보위기를 불러오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 은유가 안보, Security,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안전을 위협한다. 나는 아주 이기적인 이유로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안전한 사회에서 전쟁이나 빈곤의 위협 없이 살다 죽고 싶기 때문이다. 치킨을 사 먹던 사람 100명이 일자리를 잃는 것, 파스타를 사 먹는 사람 200명이 일자리를 잃는 것, 치즈등갈비를 먹고 아메리카노로 입가심을 하는 사람 500명이 일자리를 잃는 것의 결과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찔하다. 기업이 살기 위해 직원들을 해고(구조조정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은 이런 사실을 가린다)했을 때, 그 기업이 생산한 재화를 소비할 사람도 없어지는 것 아닌가.

얼마 전 시민사회 활동가 몇 명과 밤중에 맥주를 마시다가 지역사회 운동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청년들을 위한 사업을 하든, 힙스터들이 몰려드는 멋진 골목을 조성하든 건물주들이 쫓아내 버리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 자조적인 웃음을 띠고 이렇게 말했다. “강남 아줌마들을 막을 수가 없어요.” 강남의 부동산 부자들은 인맥과 정보력을 동원해서 전국 방방곡곡의 ‘돈이 되는’ 지역들을 찾아내고, 그 곳의 지역 활동에 개입한다고 한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것 역시 안전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에 토대를 둔 것일 테고, 나 역시 같은 욕구를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순간의 안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치워야 할 짐짝 취급하다 보면, 곧 그들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이다.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이러한 안보위기 앞에서 더 열심히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 한다. 없던 일자리도 만들어 보고, 시간당 최저임금도 더 올려 보고, 기본소득도 도입하다 보면 우리는 더 안전한 세상에 살게 되지 않을까? 그러한 시도가 가능하게 하려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손에 움켜쥔 것을 조금 더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자기 삶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임금노동자들을 더 쥐어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여정훈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운영자>